[김종수의 농구人터뷰⑪] ‘이동미사일’ 김상식 “끊임없이 배우고 있습니다”

김종수 / 기사승인 : 2021-11-09 09: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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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인 김상식(53, 182cm)하면 많은 이들은 농구인 2세, 지도자로서의 행보를 먼저 떠올린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4번이나 감독대행을 했으며 이후에도 국가대표 사령탑을 맡으면서 활발한 지도자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선수생활 은퇴 후 곧바로 코치 생활을 거쳐 감독대행, 감독 등 쉴 새 없이 달려온 부지런한 지도자다. 감독대행을 많이 했다는 부분은 그만큼 어려운 상황 속에서 팀을 재정비하는 능력이 좋고 위기관리능력도 탁월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사실 김상식은 지도자뿐 아니라 선수로서도 빼어났던 인물이다. 기업은행(실업), 나산(프로) 등 주로 약팀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탓에 주목도는 적었지만, 기량 자체만 보면 당대 쟁쟁한 레전드 슈팅가드와 비교해 절대 떨어지지 않는 최상급 테크니션이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김상식이 현역으로 뛸 때도 돌파, 드리블, 패싱능력, 슈팅 등을 고르게 갖춘 전천후 올 어라운드 슈터는 극히 드물었다. 그는 찬스에서 받아먹기만 하던 대부분의 슈터와 달리 뛰어난 개인기로 수비수 한두 명쯤은 가볍게 제칠 수 있었고, 자신에게 수비가 몰리면 넓은 시야를 살려 동료들의 찬스를 봐주는 능력이 탁월했다.

거기에 빈 공간을 잘 찾아 움직이는 것을 비롯해 3점슛은 물론 돌파 후 중거리슛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워낙 빠르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로 무빙슛을 던졌던지라 ‘날다람쥐’, ‘이동미사일’ 등의 별명이 붙었다. 사이즈에서 아쉬움이 남았을 뿐 못하는 게 없었다.

특히 한창 젊은 시절이었던 기업은행 시절에는 작전타임 때마다 상대팀 벤치에서 “다른 것 하지 말고 무조건 (김)상식이만 막아”라는 말이 수시로 들려올 정도로 집중 견제의 대상이었다. 경기 내내 수비의 표적이 되었음에도 꾸준히 에이스로서의 위력을 잃지 않았다. 역대 테크니션 중 가장 저평가된 인물이라는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보여준 것에 비해, 업적에 비해 늘 과소평가 되고 있다는 농구인 김상식을 만나 치열했던 그의 농구 인생을 들어보았다.

Q.어떻게 지내십니까?
요새 코로나19 시국이다 보니까 체육관은 거의 못 나갔어요. 현재는 별다른 일은 하지 않고 쉬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예전부터 취미가 있던 등산을 종종 다니고 있어요. 평생 농구만 하다 보니 특별한 취미가 없네요.

Q.카카오톡 프로필을 보니까 산과 강, 사찰에 있는 신장 사진도 있더라구요. 조용한 곳에서 생각도 정리하고 그런 생활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맞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경기 전후에 조용한 산을 찾아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종종 가지는 습관이 있어요. 경기 전에는 어떻게 경기를 풀어나갈까에 대해서 구상을 해보고요. 경기 후에는 ‘아, 그때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에는 이 부분을 보강해야겠다’ 등 복기를 하고 그래요. 어느 순간부터 몸에 배다 보니까 와이프도 이해해주더라고요. 짧게 1박 2일 정도로 다녀오는 코스죠. 그러다가 경치가 좋아서 한 컷씩 찍었던 것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 때부터 불교 집안이에요. 저는 ‘불교를 믿는다’ 그런 수준은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 자체를 좋아하다 보니 산에 가서 사찰이 있으면 한 번씩 들어가 보고 그럴 때도 있어요.

Q.혹시 나중에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에서 뵙게 되는 것 아닌가요?(웃음)
하하핫…. 아닙니다. 그 정도까지 자연에 푹 빠져 사는 사람은 아니에요. 낯선 산을 막 찾아다니고 그러지도 않고요. 사진 찍힌 곳이 다 속초예요. 주로 거기 위주로 가요. 속초는 바다하고 산이 같이 있잖아요. 등산 한 번 하고 내려와서 혼자 식사하고 뭐 그런 정도죠.

Q.KBL 공식 홈페이지를 확인해보는데도 선수 시절 기록이 안 나와요. 어떻게 된 것이죠?
아, 그런가요? 왜 없을까요. 저도 모르고 있었네요. 스스로 제 기록을 거색해보고 그러지 않다 보니까. 프로에서 생활이 길지 않아서 별 기록도 없을 거예요.

Q.짧은 머리에 백발이 인상적이세요. 영화배우 ‘ㅇㅇㅇㅇㅇ’ 느낌도 나구요.
헉! 큰일 납니다. 영화배우 그분 이야기는 꼭 빼주세요. 저 완전 욕 바가지로 먹습니다. 그런 미남 배우와 저를 비교하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히 머리 하얗다고 비교를 해버리면 세상에 비교 안 될 사람이 없죠(웃음). 사실 왜 염색 안 하냐는 얘기는 종종 들었어요. 저는 30대 초반부터 염색을 하기 시작했어요. 부분적으로 하얗던 게 아니라 그때도 전체적으로 흰머리가 많았습니다. 빨리 와서 그때부터 전체 염색을 했는데 그렇게 20여년을 하다 보니까 두피가 안 좋아지는 것 같더라고요. 2018년에 진천선수촌 생활을 할 때였는데, 그때 염색할 타이밍을 놓쳤었어요. 시간도 없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지냈는데 그 상태로 아시안게임까지 갔다 오게 되고 자연스럽게 현재 머리로 되어버렸어요. 지금은 이 모습도 자연스러워 보이고 그러지 않나 싶어요.

4번의 감독 대행, 그리고 국가대표 사령탑


Q.지도자 경력이 상당하세요. 하지만 길게 머물러있기보다는 짧게 자주 하신 케이스인데요. 어떻게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그렇죠. 자의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나산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SBS로 트레이드가 됐죠. 이후 KGC(당시 KT&G)에서 SBS를 인수하게 됐고, 당시 코치로 팀에 남아있던 저는 어쨌든 창단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받은 것이죠.

Q.KGC에서 첫 감독대행을 하셨습니다. 프랜차이즈 스타도 아니고 해당팀에서 선수 생활을 길게 한 것도 아닌데 팀에서 감독대행을 맡긴 것은 그만큼 리더십과 지휘력을 일찌감치 인정받았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그건 아니었을 거예요. 제가 당시 수석코치였어요. 감독님이 시즌 중에 나가게 되면 수석코치가 대행을 맞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인정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제가 알 수 없죠. 다만 그런 이유보다는 수석코치를 하고 있었고,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제가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Q.감독대행으로서 짧은 기간 동안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음에도 외부 인사가 와서 코치로 다시 내려가셨고, 그 다음 시즌에는 팀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많이 서운하셨을 것 같아요.
감독대행을 한다는 것은 이전 시즌 성적이 안 좋아서 감독님이 나가시게 된 경우잖아요. 그런 어수선한 상황을 수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죠. 분위기도 바꿔보고 떨어진 사기도 끌어 올려야 하죠. 선수들하고 뭉쳐서 열심히 틀을 잡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이후에 다른 분으로 바뀌어버리고…. 나름대로 구축해놓은 것을 이어가지 못하는 부분은 아쉬운 것이 사실이죠. 하지만 제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팀 입장에서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요.

Q.이후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 오리온), 서울 삼성은 물론 국가대표팀까지 정말 많은 감독대행을 하셨어요. 감독대행과 일반 감독은 아무래도 향후 계획을 진행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겠죠?
일단 감독대행을 하게 되면 공부가 많이 돼요. 앞서 말씀 드렸지만 감독대행은 팀이 어려울 때 맡게 되는 거잖아요. 본의 아니게 여러 번 대행을 하다 보니까 배우는 것도 많아지고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되겠다’ 등의 노하우도 생기더라고요. 감독은 시즌 전체를 미리 준비하고 가는 입장이지만, 대행은 말 그대로 긴급 소방수인지라 다른 점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Q.더불어 프로팀 감독과 국가대표팀 감독도 여러모로 차이가 많이 날 듯 싶어요.
프로팀은 베스트5 등 핵심 전력이 딱 보이잖아요. 하지만 국가대표는 각 팀에서 난다 긴다하는 선수들이 오는지라 주전, 백업 등 각자의 역할을 정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어요. 다들 각 팀에서 잘했기 때문에 뽑힌 거잖아요. 프로팀 감독할 때와는 또 달라요. 처음에 코치로서 허재 감독님에게 많이 배웠죠. 사실 허 감독님이 나가실 때 저도 당연히 따라 나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허 감독님께서 전화 주시고 협회에서도 맡아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얘기해서 얼떨결에 맡게 된 것 같아요.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많이 배운 것은 사실이지만 예상치 못하게 중책을 맡게 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거든요. 그때 생각하면 뭐 이래저래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Q.개인적으로 느낀 건데요. 다들 감독님께 의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 같고, 감독님께서도 최대한 지켜주려고 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정작 감독님께는 의리를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휴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제가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어려운 부분 같아요. 그 상황에 따라, 당시 분위기에 따라 서로 오해가 생길 수 있는 거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풀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도 일에 관해서는 냉정할 때는 냉정해지고 합니다.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야 감정이 많이 작용할 수 있겠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서는 최대한 객관적일 필요가 있죠. 사람들이 저에게 의리를 바란다? 제가 의리를 지키려고 하는 스타일이다? 정작 그 사람들은 저에게 의리를 지키지 않은 것 같다? 이런 것들은 누가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냐의 차이일 뿐이죠. 어쨌든 저를 믿어주고 자리를 맡겼던 분들께는 항상 감사드리고, 좀 더 잘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도 큽니다.

Q.첫 정식감독을 하셨던 오리온스 시절, 간판스타 김승현이 부상으로 빠지는 등 이래저래 운도 안 따르셨던 것 같아요.
대행 역할만 하다가 그때 처음으로 정식감독을 했어요. 이전 시즌 강팀들을 차례로 잡아가며 연승 행진을 하는 등 초반에는 잘나갔어요. 그러다가 (김)승현이가 다쳤어요. 당시 팀에서 승현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컸어요. 단순히 잘하는 선수 한 명이 아닌 제가 맡기 전부터 승현이 위주로 팀이 만들어진 상태였어요. 승현이의 부상은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 모두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죠. 그 다음부터 사방에서 압박이 들어오더라고요. 단순히 성적이 떨어져서가 아닌 그런 부분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더불어 시기적으로 안 맞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작전타임 때 코치진들과 상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좀 더 꼼꼼하게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였어요. 미국 연수 때 경험했던 현지팀들 중 감독이 수시로 코치들과 상의하고 의견을 취합해서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경우도 많이 봤거든요. 그게 당시에는 굉장히 생소한 광경이었나 봐요. ‘얼마나 감독이 무능하면 작전타임 때 코치와 상의를 하냐. 몰라서 물어보는 거냐?’라며 비난이 막 쏟아졌습니다. 사실 감독이 욕먹는 부분은 어쩔 수 없어요.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고요. 잘하면 칭찬 받고 못하면 비난도 받고. 프로스포츠 감독이 감수해야 될 부분 같습니다.

Q.국가대표 사령탑을 내려놓게 된 것은 선수 선발 과정에서의 잡음이 결정적 이유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저는 공과 사는 정확하게 지키고 나름대로 기준을 정하고 일을 진행하려는 편입니다. 그만둔 이유 역시 누군가 뭔가를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서로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부분도 컸다고 보면 됩니다. 저는 국가대표 감독 입장에서 최대한 좋은 전력을 갖춘 팀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입니다. 다만 프로 역시 시즌이 진행 중인 상태였던지라 그런 부분이 겹치며 의도치 않게 손해를 봤다고 느껴 서운한 분들도 계셨던 것 같습니다. 자꾸 사방에서 갈등이 이슈화되고 시끄러워지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정리를 해야 할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어서 이 상황을 끊지 않으면 국가대표팀에도, 프로리그에도 악영향이 우려되었습니다.

Q.감독 김상식에게 지도자란 어떤 의미일까요?
아우…. 여전히 어려워요. 제가 지도자 경력이 짧은 편은 아니지만 앞으로 몇 번을 더한다 해도 어렵다는 데는 변함이 없을 것 같아요. 배우고 또 배워나가도 부족함이 느껴지는 게 지도자라는 길 같아요. 선수 때는 본인이 해야 될 것 혹은 감독, 코치님께서 지시하시고 조언해주시는 것만 하면 됐거든요. 지도자는 본인도 잘해야 하고 함께하는 선수들도 업그레이드 시켜야 하죠. 팀원 모두에게 동기부여도 만들어줘야하고요. 다른 훌륭한 감독님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하우가 쌓이긴 쌓이지만, 상황마다 다 다르니 끊임없는 배움의 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도자라 하면 책임을 지고 감수해야 될 부분이기는 하죠.

레전드 부친의 큰 자리


Q.농구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중학교 때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이전부터도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축구하러 다니고, 농구하러 다니고 돌아다녔어요. 집에서는 운동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으셨는데 워낙 운동만 하니까 안 되겠다 싶으셨나 봐요. 결국 여의도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농구를 전문적으로 할 생각으로 배재중학교에 전학을 갔어요.

Q.아버님께서 현역 시절 워낙 대단한 스타셨어요. 레전드 부친을 둔 2세들이 운동을 할 때 상대적인 비교에 부담이 많이 된다던데 감독님께서는 어떠셨는지요?
운동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아무래도 그런 얘기가 안 나올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덜 들으려면 열심히 해서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것도 있지만 실력이 비슷하다고 치면 ‘그래도 저 친구는 아버님이 누구신데’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어요? 비슷하면 안 되고 무조건 나아야 된다는 마음으로 개인 연습을 무지하게 했어요. 단체훈련이야 어차피 똑같이 하는 것이니까 개인훈련을 많이, 열심히 하는 것에 따라 실력이 갈리는 부분이 많거든요. 어찌 보면 동기부여가 된 부분도 있겠네요(웃음).

Q.고려대학교, 기업은행 등 아버님이 걸어오신 행보를 그대로 이어갔어요. 여기에는 아버님의 조언 등도 영향이 컸을 것 같은데, 나중에 살짝 원망스러운 부분은 없으셨나요?
고려대학교에 간 것에 대해 별다른 아쉬움은 없어요. 다만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이랬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 정도는 드는 게 사실이죠. 사실 기업은행에 가기 전 삼성, 현대 등에서 이미 스카웃 제의도 있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기업은행이 가기 싫다기보다는 삼성, 현대 등은 대다수 선수들이 선호하던 팀이었잖아요. 하지만 아버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실업 선수생활도 중요하지만 이후의 인생 설계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요. 아무래도 금융팀으로 가면 은퇴 후에도 어느 정도 보장받는 게 있거든요. 사실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상식이는 아버님을 따라서 고려대, 기업은행 코스를 밟을거야’라는 말도 듣고 그랬어요. 보내준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길도 아니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맞겠지만, 어린 마음에 ‘아니 꼭 내가 그렇게 가야 하나? 나한테 다른 길은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기는 했어요. 물론 최종적으로 제가 선택했던 길이고 그렇게 했기에 지금의 김상식도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Q.기업은행을 택한 배경에는 은퇴 후 설계도 영향이 컸는데 프로농구가 생겨버렸어요.
그렇죠(웃음). 확 생겨버렸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프로화에 대한 얘기는 계속 있었어요. 시기의 문제였는데 예상보다는 빨리 생겼던 것 같아요. 이후 기업은행이 프로에 참여할 여러 팀을 대상으로 접촉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종적으로 나산이 낙점돼 광주로 내려가게 됐죠.

이동미사일


Q.별명이 감독님의 현역 시절 플레이 스타일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단순히 3점슛만 정교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이른바 무빙슛도 잘 던졌어요.
이전에 잘했던 선배님들 흉내를 많이 냈죠. 연습도 많이했고요. 이충희 선배님, 고 김현준 선배님 등등…. 그분들이 슈터이기는 했지만 서서 받아먹는 슛보다는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슛을 던지는데 능했거든요. 그분들 플레이를 보고 자란 세대로서 많이 보고 배웠습니다. 특히 이충희 선배님 플레이를 많이 참고했는데, 열심히 하다 보니 자신감도 많이 붙고 플레이 스타일도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Q.드리블 실력이 좋았던지라 슈터에 머물러있지 않고 돌파, 어시스트에도 능하셨어요. 허재 감독님의 현역 시절 미니버전 같았어요.
아이쿠…. 큰일 납니다. 허 감독님과는 비교불가죠.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갔다 붙이면 제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분 근처에도 못 갑니다. 그냥 앞서도 말했듯 아버님 이름도 있고 해서 주변에 누가 될까봐 더 열심히 했던 것뿐이지 당대 스타들의 이름을 들먹일 정도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게 봐주신 분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Q.유달리 상복이 없으셨어요. 그러다 1995~1996 농구대잔치 올스타전 때였나요? 펄펄 날면서 MVP를 받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 그것을 기억하시네요. 그날 상을 여러 개 받았을 거예요. 그 외에도 게토레이상, 자유투상까지 받았던 것 같아요. 컨디션이 좋은 날이었죠. 슛 감도 좋았고 움직임 자체가 유달리 가벼웠어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떠오르네요.

Q.상무 시절이었나요. 서장훈을 앞세워 무패행진을 벌이던 연세대와 결승에서 맞붙어 아쉽게 패하기는 했지만, 슈터 김상식은 빛났습니다. 재빠르게 이러저리 움직이면서 슛을 던지는지라 ‘날다람쥐’라는 별명도 생겼던 것 같고요.
솔직히 연세대가 너무 강하기도 했지만, 상무도 멤버가 상당히 좋았어요. 정재근, 이상범, 남경원, 이창수, 표필상, 오성식 등 쟁쟁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 좋은 선수들 덕을 많던 봤던 것 같아요. 스크린도 잘 서주고 기회도 많이 만들어주고 슈터로서 슛 던지기가 편했어요. 1승인가 따내고 패한 게 지금도 아쉽게 느껴집니다.

Q.감독님이 저평가받는 배경에는 약팀 에이스라는 것도 있지만 국가대표 경력도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슈터로서 국제 경쟁력을 가지기에 신장(182cm)에서 아쉬움이 남았죠. 포인트가드로 전향해봐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은 없으셨나요?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은 들지만 학창 시절부터 해온 플레이 스타일이라는게 있기 때문에 단시간에 바꾸기는 힘들었을 것 같아요. 지금이야 포인트가드, 슈팅가드를 오가는 선수들도 많지만 그땐 포지션별 분업화가 확실했던 시대고요. 1번에 좋은 선수들도 워낙 많았잖아요. 신장이나 사이즈를 위안 삼고 싶지는 않고요. 더 잘하는 선수들이 있어서 조금씩 부족했던 제가 국가대표로 자주 뽑히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잠깐씩 왔다 갔다 한 정도죠. 이렇게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고 저렇게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 게 선수 생활이겠지만 객관적으로 돌아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Q.감독님께서 현역 때 보여준 볼 컨트롤과 패스감각을 봤을 때 지금 시대에 농구를 한다면 충분히 듀얼가드로서 경쟁력이 있었을 것 같아요. 김낙현(한국가스공사)만 보더라도 3점슛을 장기로 하면서도 1번을 보고 있잖아요.
제가 지도자 때 느낀 것 중 하나가 ‘아, 요즘 선수들 정말 농구 잘한다’입니다. 단순히 ‘나 때는…’이라고 말하기에는 잘하는 선수가 너무 많아요. 전략 전술도 발전하고 포지션 파괴도 되면서 다양한 농구가 펼쳐지고 있잖아요. 김낙현만 하더라도 자신의 스타일을 잘 활용해서 경쟁력을 가져가는 정말 좋은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나산 헝그리베스트5


Q.나산 시절이던 1997-1998시즌 아도니스 조던, 김상식, 김현국, 이민형, 브라이언 브루소 등으로 이뤄졌던 '헝그리 베스트5'는 지금까지도 매우 매력적이었던 멤버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농구 역사에서 잊히면 안 될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로화가 되면서 한팀이 통째로 옮겨오는 상황이었던지라 아무래도 나산의 전력이 약한 편이었죠. 좋은 선수도 있었지만 선수층이 얇은 편이었고, 다들 알다시피 팀 재정도 좋지는 않았죠. 조던은 신장(178cm)은 낮았지만 캔자스인가 그쪽에서 굉장히 유명한 선수였다고 들었어요. 공항에서 외국인들이 알아볼 정도였다고 하더라고요. 단순히 선수들이 알아보는 게 아닌 일반 외국인들이 알아본다는 소리를 통역한테 전해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사이즈는 아쉬웠어도 스피드와 드리블을 앞세워 내외곽을 넘나들면서 득점을 올리던 개인기가 무척 좋은 선수였어요. 중간에 부상만 당하지 않았다면 저희 팀 성적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단신 외국인선수 중 정말 잘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신문 등에서 본인의 지명 순번에 조던이 실망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도 나는데, 해외에서의 인지도나 국내에서 보여준 기량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브루소는 특출난 것은 없었지만 성실하고 듬직한 스타일이라고 보면 맞을 것 같아요. 우직한 빅맨이었죠.

Q.당시를 함께했던 김용식 중국 지린 청소년팀 총감독의 말을 들어보면 진짜 제대로 헝그리했던 시절 같아요.
나산 시절의 기억이 강해서 저를 나산맨으로 기억해주시는 분들도 많은데 사실 저는 2년 정도 밖에 안 있었어요.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할 정도로 팀이 재정적으로 좋지 못했던지라 제가 현금트레이드에 의해 타 팀으로 가게 됐죠. 그렇게 해서 급한 불을 껐지만 여전히 어려웠던지라 그 뒤로도 선수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Q.함께 했던 외국선수 중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당시 나산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선수가 있잖아요. 에릭 이버츠! 저 역시 그 선수가 참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사실 처음에 기대를 크게 안 한 선수였거든요. 프로가 만들어질 때 기업은행이 간다 안 간다 정확하게 노선을 정하지 않아서 맨 뒷 순번에서 외국선수 두 명을 뽑게 되었어요. 이버츠도 그렇게 해서 들어왔던지라 다른 팀에서 상위 순번에 뽑힌 선수들보다 잘할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죠.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잘했잖아요. 막 운동능력 좋고 탄력 넘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플레이 자체를 영리하게 하고 슈팅도 정확했어요. 덕분에 저희 팀도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원체 센스가 넘치는 선수인지라 현 시대에 뛰었어도 잘했을 것 같아요.

Q.나산의 팀 사정이 워낙 안 좋아서 현금 트레이드에 의해 SBS로 갔어요. 그 과정에서 혼자 살기 위해 팀을 옮긴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억울했죠. 당시 팀은 어려웠지만 분위기는 정말 좋았습니다. 저 역시 나산 생활이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팀 입장에서는 꾸려나갈 여력이 부족했어요. 이래 저래 궁리를 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저를 현금 트레이드 하는 것이었죠. 저한테는 트레이드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어요. 제가 가고 싶다고 혹은 가기 싫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김상식을 기억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었는데 기억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특출난 것은 없었지만 선수 시절에도 그랬고, 지도자가 되어서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했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을 할 지는 모르겠지만 늘 하던 대로 끊임없이 배우고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글 / 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 본인 제공

◇ 필자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농구를 사랑하던 오랜 팬으로 2002-2003년 본지에 농구 무협소설 '해동전설(海東傳說)''을 연재한 바 있으며 데일리안, 홀로스, 올레,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스포츠 객원기자로 활동한바 있다. [김종수의 농구人터뷰]를 통해 전현직 농구인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으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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