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서커스, 쇼 그리고 농구

/ 기사승인 : 2022-02-10 16: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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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⑪
▲김영기의 독특한 경기방식이 국내 농구계의 인정을 받기까지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사진은 김영기를 아시아의 명인으로 소개한 19581223일자 경향신문 4면 기사. 흐릿한 사진이지만 젊은 날 김영기의 앳되고도 반항기 가득한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존 번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김영기는 여전히 미완의 선수로 남아 있었다. 김영기는 번의 가르침과 영향을 크게 받아들였지만 직접적인 변화는 없었다. 농구에 대한 생각, 마음가짐의 일부에 작은 돌기가 돋은 정도 아니었을까. 국내 무대에서 김영기는 변함없이 환영받지 못했다. 자기 발전을 위한 그의 노력은 이기심이나 헛된 생각의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존 번은 한국 땅을 떠나자마자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러니 그의 이론을 기억하고 그 가치를 이해하는 농구인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김영기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지만 결코 꺾이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맞은 첫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소년티를 벗은 김영기는 “나의 농구를 건설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존 번이 남기고 간 가르침은 좋은 재료들이었다. 이 재료를 제대로만 다듬어내면 훌륭한 건축물이 완성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심지어는 비방했다. 김영기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닦아세웠다. 그 결과 어느 사이엔가 ‘안전한 슈팅’, ‘안전한 패스’, ‘안전한 농구’의 한계를 탈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대일 일변도의 개인플레이에 골몰하지는 않았다. 개인플레이로 시작하는 듯 보여도 결국은 팀 전체의 경기와 조화를 이루는 농구였다.

당시로서는 매우 과감한 경기 방식이었기에 우리 농구계가 김영기의 플레이를 이해하기는 아직 일렀다. “너무 개인플레이를 한다.”는 혹평은 계속됐다. 심한 비난도 없지 않았다. “저 친구는 성격적인 결함이 있다.”거나 “농구기형아”라는 폭언까지 들었다. 김영기는 때때로 고립감을 느꼈다. 그러나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 존 번이 남기고 간 농구의 새 경지를 발견하는 데 골몰했다. 그러는 동안 김영기를 둘러싼 분위기는 조금씩 호전되었다. 그가 속한 고려대 농구팀의 승률이 점점 높아진 것이다. 고려대가 지는 경기를 거푸 했다면 김영기의 의지도 위협받았을 것이다.

고려대의 승률과 함께 김영기의 경기 기여도도 차츰 향상되었다. 그는 완전한 기회에서 슛을 던지는 대신 모험적인 득점을 노렸다. 그런데도 경기당 30득점을 기록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기록은 김영기가 모험적인 공격을 즐겼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매일 300개 이상 슛을 던지며 가다듬은 득점력이 성과를 냈다고 봐야 정확할 것이다. 어찌됐든 결과는 선명했다. 김영기의 플레이는 고려대 농구팀이 승리를 거두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으로 자리를 굳혀 나갔다. 이렇게 승률이 좋아지면서 “농구는 단체경기지만 경기의 출발은 개인의 능력에 기초한다.”는 김영기의 농구철학이 고려대 농구팀에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고려대 농구팀은 임동수 코치가 이끌고 있었다. 김영기는 1학년 전반기 동안 조득준 코치의 지도 아래 기초를 다지는 데 힘썼다. 조 코치가 개인 사정으로 휘슬을 내려놓은 다음 만난 임 코치는 김영기를 중심으로 한 공격 방식을 고안해서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김영기의 기록이 향상되고 고려대 농구팀의 승률이 오르는 현상은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래도 김영기의 경기 방식은 농구 전문가들의 혹독한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울 낙원동에 있는 문화관에서 경기가 열리는 날, 김영기는 묵직한 스포츠 가방을 둘러메고 시내버스에 올랐다. 버스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야, 지금도 늦지 않았다. 우리 내려서 영화구경이나 하지!”
“잠자코 따라와, 내가 진짜 농구를 보여줄게.”
“시시하게 농구는 무슨 농구. 난 그런 것 취미 없어.”
좀 떨어져 앉은 다른 친구가 참견했다.
“뭐? 취미 없어? 너 한동안은 농구장에 열심히 다니더니 웬일이니?”
“밤낮 보아야 그 농구가 그 농군걸. 뻔해, 뻔해.”
“자식! 인마, 네가 아직 고대 9번을 못 봐서 그래. 그 자식 뛰는 건 말야, 이건 귀신이라 귀신!”
“그래. 그 자식 농구하는 건 정말 진짜 농구 보는 것 같아! 키도 조그맣고 체격도 쬐끄만 게….”
“야, 그 9번 이름이 뭐지?”
“글쎄, 김 뭔데?”
“그래, 김 뭐야.”

김영기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고대 9번’은 김영기의 백넘버였다. 김영기는 얼굴을 바로 들지 못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앉았다. 학생들의 재담은 계속됐다.

“여봐라, 고대 9번이 어찌하기에 그대들이 다 야단인고?”
“말 마소이다, 원님. 하하… 그런데 그 친구가 한 번 공을 잡았다 하면 그건 손에 붙어 다니니까! 손에 지남철(자석)이 있는 것처럼 말야!”
“뭐? 드리블을 그렇게 잘하나?”
“그뿐인 줄 아니? 볼을 몰고 들어가는 데는 정말 귀신이야.”
“그 자식, 정말 볼 핸들링은 멋져!”

김영기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피식 웃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속으로는 감격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만난 그 학생들은 제법 농구를 알고 즐기는 친구들이었다. 김영기는 이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면서 자신감과 확신을 얻었다. 자신의 플레이, 고립되고 환영받지 못하는 플레이에 자신이 생긴 것이다. 우연히 주워들은 이 몇 마디 말들이 코치나 동료 선후배의 격려보다 더 힘이 됐다. 버스에서 학생들의 대화를 듣는 동안 그는 적잖이 흥분했고, 이 기분은 고스란히 경기장으로 이어졌다. 경기장에 울리는 박수 소리, 관중의 환호성이 모두 자신을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김영기가 경기장의 박수소리에 익숙해질 즈음 고려대 농구팀은 일반팀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김영기는 농구계의 새로운 스타로 각광받는 존재가 되었다. 미디어는 신인 연예 스타가 등장할 때처럼 요란스럽게 반응했다. 올림픽 스타들의 인기를 뛰어넘는 신드롬이 일었다. (김영기의 표현을 따르면) ‘이상한 곳에서의 이상한 박수’가 그의 플레이를 격려해 주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농구계 내부의 박수소리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혹평이 날아들었다. “김영기는 농구를 서커스와 혼동하고 경기장에서 서커스를 하려 든다.”는 평가였다. 그러니까 김영기는 농구선수, 나아가 운동선수가 아니라 쇼맨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중을 사로잡는 개인 쇼를 경기장에서 한다는 이야기였다. 김영기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영기의 농구가 서커스가 아니고 쇼는 더욱 아니라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확인되었다. 그것도 한국 농구계가 아니라 외신을 타고 외부에서 전해진 것이다.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의문을 풀려면 시계바늘을 되돌려 1956년 1월의 어느 날로 시간여행을 해야 한다. 장소는 자유중국(대만)의 타이베이. 아시아 4개국 농구대회가 처음으로 그곳에서 열렸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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