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새벽 남산길을 달리는 소년

/ 기사승인 : 2022-04-21 17:31:22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㉒

배재고등학교 농구부의 훈련은 방과 후에 시작됐다. 농구부원들은 하학종이 울릴 때 코트에 모였다. 농구부는 일반학생은 물론이고 다른 운동부원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한 시간쯤 훈련을 더 했다. 이희주 코치의 지도는 그렇게 강하고 엄했다. 김영기는 한 술 더 떴다. 농구부원들이 몸을 씻을 때 얼굴만 대충 씻는 시늉을 하다가 다른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자리를 떠나 농구 코트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혼자서 그날 배운 내용을 다시 해보았다. 김영기의 복습은 해가 져서 공과 골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됐다. 이 일이 매일 반복됐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김영기는 아무도 모르게 훈련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희주 코치가 김영기를 불러 뜻밖의 충고를 했다. 이 코치는 “그렇게 해서는 오래 못할 것이다. 소질은 보이는데 별로 느는 것 같지 않으니 생각을 더 차근차근 하면서 훈련하라.”고 타일렀다. 김영기는 다른 농구부원은 물론 이희주 코치조차 모르게 훈련하고 싶었다. 충고를 듣고서야 코치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다. 별로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소질은 있어 보인다.”는 그 한 마디가 가슴 속에 힘찬 기운을 담아주는 것 같았다. 김영기는 기운을 얻었다. 주전 선수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이 무렵 배재고 농구부에는 김영기보다 고학년이 없었다.

농구에 완전히 몰입한 김영기는 집에 머무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학교에는 코트가 있었지만 집 근처에는 훈련할 곳이 없었다. 김영기는 궁리 끝에 옆집 뒷벽에 농구공만한 원을 백묵으로 그렸다. 여기에 공을 던지며 패스 연습을 했다. 달리면서 이 원을 향해 마치 동료에게 패스하는 기분으로 힘껏 공을 던졌다. 벽에 맞고 튀어나오는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받기 위해 노력했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수없이 몸을 던졌다. 그러다 보니 김영기의 두 무릎은 엉망이 됐다. 시커멓게 멍이 들고, 긁히고 짓찧은 곳에서는 피가 흘렀다. 두 다리는 먼지투성이가 됐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김영기의 두 손과 열 손가락도 무사하지 못했다. 손가락이라는 손가락은 모두 삐어서 퉁퉁 부었다. 손인지 발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의 손가락들은 몇 시간, 며칠이 아니라 늘 성치 못한 채로 날아드는 공을 붙잡았다. 그 손으로는 책가방도 도시락도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쑤시고 아팠다. 그러면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다. 환갑은 되어 보이는 한의사가 진료를 보았다. 낯빛이 소년처럼 붉고 윤기가 흐르는 뚱뚱한 사람이었다. 김영기가 보기에 백 살은 거뜬히 살 것 같았다. 이 사람에게 손을 맡기고 삔 손가락 매듭마다 침을 맞았다. 신통했다. 침을 맞으면 곧 신통하게도 통증이 사라지고 부기가 빠졌다. 김영기가 하도 자주 병원 문턱을 넘나드니까 하루는 의사가 물었다.

“그런데 넌 무슨 싸움을 매일 그렇게 하니?”
김영기는 웃었다. 그가 “농구선숩니다.”라고 하자 한의사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농구? 그럼 앞으로 며칠이나 더 할 거야?”
몇 년이 됐든 주욱 할 생각이라고 대답하자 반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매일 나한테 온단 말인가? 이거 큰일인데….”
엄연한 손님이요 환자인데도 한의사는 땀내를 풍기는 이 애송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김영기는 매일 남산가도를 달렸다. 이른 새벽에 눈을 뜨면 사위가 어두웠다. 졸음이 잔뜩 묻은 손가락 끝으로 방안을 더듬으면 땀 냄새 시큼한 트레이닝이 잡혔다. 습관처럼 방문을 열고나가 아래층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도둑이 남의 집 문을 열 듯 은밀하고 조용하게 새벽 거리에 나섰다. 한여름에도 새벽바람은 싸늘했다. 이때쯤 김영기는 잠에서 완전히 깼다. 그러면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농구소년의 워밍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코스는 남산가도를 달려 남대문으로 빠져서 서소문의 법원(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 뒷길로 들어서서 배재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새벽 달리기를 하는 길에 김영기가 마주치는 사람들은 날품팔이 지게꾼, 새벽에 떠나는 노동자, 허리가 휜 두부장수처럼 고단한 하루를 시작하는 가난하지만 성실한 시민들이었다. 김영기는 오전 5시30분쯤 학교에 닿았다. 학교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리면 수위가 일어나 경비실에서 나왔다. 수위는 김영기에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수위는 두 사람이었는데 둘 다 노인이었다. 김영기는 『갈채와의 밀어』에서 늙은 수위들이 자기 때문에 골병이 들었을 거라고 미안한 감정을 표현했다. 이른 새벽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문을 열어 주어야 하니 표정이 좋을 리 없을 거라고도 했다. 처음에는 낯색을 고치고, 고치고 했지만 나중에는 타이르기도 하고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체념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김영기는 아무도 없는 새벽 코트에서 혼자 훈련했다. 물론 공은 없었다. 빈손으로 슛 폼을 가다듬고 드리블 자세를 잡아 보고 푸트워크를 연습했다. 이렇게 혼자 30분 정도 훈련하고 나면 배가 고파졌다. 그러면 그는 따뜻한 아침 밥상을 그리며 집을 향해 달렸다. 이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오후 방과 후에 하는 훈련은 하기 싫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죽기 살기로 대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건 훈련이 아니라 육체노동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가슴 속 저 깊은 데서 회의(懷疑)가 뱀의 대가리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자의 인기기사

JUMPBALL TV

오늘의 이슈

점프볼 연재

더보기

주요기사

더보기

JUMPBALL 매거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