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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루과이와의 B조리그에서 패스할 곳을 찾는 대한민국의 가드 방열. 김영기(6번)와 하의건(4번)이 따라붙고 있다. |
1964년 도쿄올림픽은 10월 10일부터 24일까지 열렸다. 대한민국은 17개 종목에 154명을 파견해 은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따냈다. 정신조가 권투, 장창선이 레슬링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김의태가 유도에서 동메달을 기록했다.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한 데 비하면 기대에 미치기 어려운 성과였다. 극적으로 본선에 진출한 대한민국 남자농구의 성적도 좋지 못했다. 16개 참가국 가운데 최하위를 했다. 예선 B조 리그에서 미국,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우루과이, 핀란드, 호주, 페루를 상대해 전패를 당했다.
김영기는 B조 리그 7경기에서 평균 16.9득점을 기록했다. 5년 뒤 한국이 아시아 정상에 도달할 때 주포를 맡는 신동파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득점 부문에서 하의건과 김무현, 김인건의 영향력이 더 컸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3-16위전으로 떨어진 대한민국은 헝가리에 83-99(전반 43-38)로 져 15위 결정전으로 추락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페루에 다시 한 번 66-71(전반 31-37)로 져 꼴찌를 면치 못했다.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김영기는 무려 31점을 쏟아 부었다. 하의건(9), 김종선(2), 김무현(13), 신동파(7), 김인건(14), 김승규(1), 정진봉 (6). 페루와의 경기에서는 김영기(24), 하의건(7), 김종선(2), 김무현(4), 신동파(14), 방열(1), 김인건(4), 정진봉(10) 등의 기록이 남았다. 대회를 통틀어 김영기의 득점은 경기당 19.2점에 이른다.
경기력의 차이가 선명했다고 해도 9전 전패 최하위라는 성적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도쿄올림픽 본선이나 대회가 끝난 다음 김영기와 관련해 눈에 띄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1964년 12월 19일자 동아일보의 송년 기획인 듯한 7면 연재 난에 작은 박스 기사 하나가 게재되었다. 대문은 ‘1964년 화제의 주인공들’이다. 기사 제목은 ‘동양의 골게터 김영기 선수.’
"지난 9월 도쿄올림픽 요코하마 농구예선대회 때 요코하마문화체육관에는 김영기 선수의 이름이 체육관을 진동했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움직였다. 그 가운데도 키가 작은 김 선수-곡선을 그리면서 드리블, 패스 이어 김선수에게로 다시 패스, 김 선수의 슛 골인. 전광게시판에 불어가는 한국의 득점수. 우레와 같은 박수. 또다시 체육관을 진동시키는 김 선수의 이름. 잘 싸웠다 한국선수. 잘 싸웠다 김영기. 우리나라가 올림픽 농구본선에 출전하기는 도쿄올림픽이 처음이었다. (어쩐 일인지 이 당시 언론은 1956년 멜버른올림픽 출전 사실을 인지하지 않고 있다.-필자 주) "만일 김영기가 없었다면 한국은 평범한 팀에 불과하다."는 캐나다의 앨런 리 코치의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니었다. (후략)"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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