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때 몸무게요? 62kg을 넘지 않았어요”

김종수 / 기사승인 : 2021-12-13 19: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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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⑮]‘블록슛의 여왕’이종애

박신자, 박찬숙, 성정아, 정은순, 정선민 그리고 박지수까지 한국 여자 농구는 계속해서 걸출한 빅맨을 배출해왔다. 그런 센터계보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 중 하나가 이종애(46‧187cm)다. 명성 자체만 놓고 보면 살짝 못 미칠 수도 있겠지만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WKBL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우승을 경험했으며 국가대표팀에서도 오랜시간동안 많은 공헌을 했다.

이종애는 기존 전설들과는 많이 다른 스타일의 센터로 평가받는다. 몸싸움이 잦은 빅맨의 특성상 듬직한 체구와 강한 파워는 필수였다. 이종애는 달랐다. 호리호리한 체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키는 컸지만 마른 체형이었다. 거기에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한 케이스였던지라 다른 선수들에 비해 이른바 구력이 많이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애는 적지않은 임팩트를 남기며 센터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체형에 맞게 스피드와 점프력 등을 잘살려 기존 센터들과는 차별화된 자신만의 농구를 펼쳤다. 특히 블록슛같은 경우 남녀 통틀어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커리어를 남겼다. 골밑에서 다가오는 상대의 볼을 쳐내는 것을 물론 돌파해 들어가는 상대를 따라가 저지하는 런닝 블록에도 능했다.

WKBL로만 한정해도 그녀의 블록슛 기록은 독보적이다. WKBL에서 열린 22번 정규리그에서 블록슛 타이틀만 무려 11번을 수상했다. 2010년 3월 24일 KB스타즈전에서는 블록슛을 무려 10개나 만들어낸 적도 있다. 그녀는 정규리그 통산 407경기에서 12.88득점, 7.49리바운드, 1.48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주목할만한 부분은 역시 블록슛이다. 무려 평균 2.12개다. 통산으로 따지면 총 862개인데 어시스트와 스틸을 합친 숫자와 맞먹는다. 플레이오프 기록(160개)까지 합치면 1,000개가 넘어간다. 그야말로 블록슛 하나만큼은 이전 이후를 모두 따져도 대적할 선수가 없을 정도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농구, 그로 인해 부족한 기본기. 센터로서 많이 가벼운 체중 등 여러 가지 핸디캡을 딛고 레전드 센터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블록슛의 여왕’ 이종애, 그녀의 빠르고 높고 박진감 넘치는 농구 인생을 <농구人터뷰>에서 함께 들어보았다.
 

 


Q.확 떠오르는 75년생 여자 농구 선수가 적은데 이렇게 토끼띠 스타분을 인터뷰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말씀 듣고 나니 유독 여자 농구 쪽에서 어느 정도 알려진 75년생이 많지 않은 것 같네요. 앞뒤 년도로 많이 비껴간 것 같아요. 음…, 누가 있을까? 아 장선형 언니 정도가 있겠네요.

Q.잉? 같은 75년생인데 장선형 언니라고 부르시네요?
아, 제가 출생년도는 75년생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한 학년을 꿇어서 학번은 아래에요. 그러다보니 언니라고 부르게 됐네요. 족보가 꼬였죠.(웃음) 근데 이게 저만 그런게 아니라 종종 있어요. 대학이나 군대 그런 곳에서도 나이보다는 학번이나 기수로 따지잖아요. 비슷한 개념이죠.

Q.나이보다 젊어보이세요. 외모도 그렇고 전해지는 느낌도 그렇고요.
하핫…, 아닙니다. 나이는 자연스럽게 먹어가고 있고요. 현재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보니까 젊은 기운을 받아서 그런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나이 먹었다고 제 기준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되기 싫어요. 다른 세대하고도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Q.어떻게 지내십니까?
숙명여대에서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스포츠 심리학에 관한 논문 준비를 하고 있고요. 숙명여대, 건국대, 극동대 등 대학교 3곳에 강의를 나가고 있어요. 제가 선수 생활 은퇴 후에 용인대를 들어가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거든요.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이것저것 공부할 것도 많고 부족한 부분도 느껴졌어요. 더불어 스포츠 심리학이라는 쪽에 대한 공부를 하면 가르치는데 있어서 훨씬 좋겠다는 판단이 서더라고요. 지도자 쪽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많이 배우고 노력해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게 되네요.

Q. 현역시절에 많이 마르셨었잖아요. 다들 은퇴하면 살이 좀 찌던데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제가 은퇴하기 2년 전부터 살이 조금씩 찌기 시작했어요. 원래 제가 몸무게가 58kg~62kg 정도 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은퇴할 때는 70kg까지 올라왔어요. 그러다 보니 몸에 힘도 좀 붙고 그러더라고요. 플레이도 더 잘되었던 것 같아요. 현재는 4kg 정도 찐 상태에요. 먹는 양이 적고 그런 것은 아닌데 살이 막 찌고 그러지는 않는 체질인 듯 싶어요.

Q.지난 8월 WKBL 선수복지위원장에 선임되셨습니다. 어떤 일을 하시는 직책인가요?
말 그대로 선수들의 전반적인 복지에 대해 연구하고 실행하는 자리에요. 현역은 물론 은퇴한 농구인들까지 두루두루 살핀다고 볼 수 있죠. WKBL에서 전국에 걸쳐 전현직 선수들의 처우나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도움을 주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거든요. 그러한 취지의 연장선에서 저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자 농구인들은 결혼 후 출산을 하게 되면 육아 등으로 멈춰야 되는 부분도 많아요. 상황이 그렇다 보니 당장 어떤 자리로 가기도 힘들고요. 거기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는 꾸준히 나오고 있었죠. 최근에는 학교 체육 쪽으로 방향을 넓혀가고 있어요. 파견을 간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은퇴 선수들 같은 경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서 여러 방향으로 도와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이기도 하니까요.

 

Q.삼성생명 유소년 농구단 코치, 용인대학교 진학, 극동대학교 여자농구부 감독 거기에 앞서 언급한 WKBL 선수복지위원장까지 은퇴 후에도 바쁘게 지내시는 것 같아요.
나름 이것저것 부지런히 생활했던 것 같아요. 은퇴하고 바로 삼성생명 유소년 농구단 코치를 맡아서 3년 정도 했어요. 이후 학생겸 선수겸 코치겸 주렁주렁 달고 용인대를 들어갔고 좀 더 배우고 싶어서 숙명여대 대학원까지 진학하게 됐어요. 이제 한학기 정도 남았네요. 극동대 여자농구부 감독은 공부를 하던 중간에 제의가 와서 가게 되었는데요. 현재는 선수가 없어서 그만두게 된 상태에요.

Q.남자와 달리 여자농구는 대학리그가 활성화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남자부와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현실이죠. 그래도 많은 사람들의 꾸준한 관심으로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용인대 농구부같은 경우 남자부만 있다가 제가 갔던 2014~15년 즈음해서 여자부가 생겼던 것 같아요. 우승도 차지한바 있고 꾸준하게 경쟁력을 가져가는 것 같아요. 여자농구의 다양한 저변확대를 위해서라도 대학농구도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Q.그런데 아무리 은퇴한지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해도 선수로 뛰시는 것은 반칙 아니었을까요?
하하핫…, 그렇지않아도 나중에 항의가 들어와서 2학년 때부터는 선수로 뛰지 못했어요. MBC배 대회였을거에요. 거기서 뛸 때 어떤 경기에서 전반전에서만 블록슛을 11개인가 기록한 적이 있어요. 그 다음부터 각 팀에서 뛰지 말라고 얘기해서 받아들이게 됐어요.
 

 

Q.다양한 경험을 쌓고 계신 만큼 프로팀 감독 제의가 들어온다면 생각이 있으실까요?
너무도 영광스러운 자리 같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인 듯 싶어요. 코치라면 모르겠으나 감독은 성급한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지도자를 하고 싶어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많은 면에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독은 무거운 자리잖아요. 충분히 코치경험을 쌓고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될 때 하고 싶어요. 물론 준비가 끝나더라도 시켜줘야 하는 것이겠지만요.(웃음)

 


“높이뛰기선수 출신이라 탄력은 자신있었죠”

Q.인천용현초등학교와 신흥여자중학교 시절에는 높이뛰기 선수로 활동했다고 들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높이뛰기를 했어요. 당시 서울에 계시던 선생님께서 저하나 때문에 인천까지 내려오셔서 지도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꿈나무로 키우려고 했던 것이고 나름 잘했어요. 대표로도 여러 대회에 출전했고요. 당시 대회 기록(1m73)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은 어떻게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계속해서 깨지지 않고 있었어요.

Q.본래 하던 종목을 포기하고 다소 늦게 다른 종목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결정도 힘들었지만 과정도 쉽지는 않았어요. 높이뛰기를 하다가 농구로 전향을 하려고 마음먹고 체육특기생으로 가려고 하니까 그렇게 못하게 막았어요. 당해 년도는 쉬는 수 밖에 방법이 없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농구를 위해서 한 학년을 꿇게 된거죠.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에 저는 농구가 어떤 스포츠인지 잘 몰랐어요. 그냥 부모님이 하라고 해서 택하게된거죠. 제가 그때 키가 많이 크고 그런 시절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높이뛰기를 해서 그런지 탄력 등이 좋았고 인성여고 선생님께서 그런 점을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요약하자면 저의 가능성을 좋게 보신 선생님께서 부모님을 설득하셨고 저는 거기에 따른 것 뿐이죠. 높이뛰기를 계속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어보시는 분들도 가끔 계신데 제가 생각했을 때 농구 하기를 잘한 것 같아요.

Q.유영주, 정은순에 이종애까지, 당시 인성여고 출신 중에는 유독 빼어난 4,5번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유달리 빅맨을 잘 길러내는 노하우가 있었던 듯 싶어요.
특별하게 빅맨을 잘 길러낸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잘 가르쳤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아요. 가드나 스윙맨 쪽도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왔어요. 다만 (정)은순 언니나 (유)영주 언니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빅맨 사관학교 같은 이미지가 붙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심욱규 선생님께서 되게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주셨어요. 몸관리 노하우부터 각종 스킬 트레이닝까지, 지금 생각해봐도 되게 시대를 앞서가신 분같아요. 팀워크를 강조하시고 조직력을 잘 다져놓으시면서도 선수 개개인에 맞는 맞춤형 지도에도 능하셨죠. 저에게도 ’종애 너는 체형이 이러니까 훅슛을 배워봐‘라고 하시면서 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Q.아무래도 센터 포지션을 보려면 파워가 있어야 하잖아요. 일부러 가벼운 몸을 유지했던 것인가요? 아님 살이 잘 안 붙는 체질인가요?
앞서 언급했듯이 먹는 만큼 살이 잘 안 붙더라고요. 아무래도 몸이 가벼우면 스피드나 점프력 등에서는 좋은 점이 많아요. 빠르게 높이 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몸싸움 등에서 어려움이 있었죠. 그러다 살이 찌기 시작했던 은퇴 2년 전부터는 플레이가 더 잘됐어요. 돌파도 더 자신있게 하게 되고 예전 같으면 피해서 슛을 쏘거나 그럴 것도 몸 싸움을 하면서 이른바 달고 뜨는 플레이에도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Q.학창시절 라이벌로는 누가 있었을까요?
라이벌이라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아, 저 선수 정말 잘했다. 붙으면 까다롭다. 경기를 하다보면 많이 배울 수 있었다’는 등의 시각으로 접근해볼께요. 학창시절에는 이후 현대에 입단하게되는 김성은 선수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신장도 저와 비슷했고 신체 밸런스와 기본기가 좋아서 정말 쉽지 않은 상대였던 기억이 나요. 정말 잘했던 선수였죠. 그 외에 박정은 선수도 기억나요. 포지션이나 플레이 스타일도 달라서 직접적으로 맞부딪힐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의외로 종종 매치업이 되었어요. 팀내에 장신자가 적어서 슈터가 주된 보직임에도 골밑플레이까지 종종 해야만 되었던 것 같아요.
 

 

“멍자국에 손톱자국까지, 그야말로 수난이었습니다”

Q.블록슛 타이틀만 무려 11번을 수상했습니다. 그야말로 블록슛 하나만큼은 역대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비결이 궁금합니다.
비결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제가 팔다리가 긴 편이기는 한데 블록슛은 그런 요소보다는 타이밍이 중요한 것 같아요. 높이뛰기를 해서 그런지 몰라도 런닝점프가 좋은 편이고 뛰어야 될 때 정확하게 뛰는 타이밍이 좋은 요소로 작용한 듯 싶습니다.

Q.선수 생활하면서 큰 부상은 없으셨나요?
십자인대가 끊어진다거나 하는 그런 치명적인 큰 부상은 없었어요. 하지만 어깨인대가 세군데가 찢어지는 등의 부상은 당했죠. 하체 부상보다는 상체부상을 좀 당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리바운드하고 블록슛을 할 때 손이 뒤로 제쳐지고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공중에서 몸싸움이나 충돌도 일어나고 상대 선수가 저의 팔이나 몸을 잡아당기거나 낚아챌 때가 발생하니까요. 허리디스크도 심한 편이었어요. 너무 아파서 진단을 받아보니 ‘수술을 하는게 어떻겠냐고’권유도 받고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안했죠. 재활하면서 이겨내는 쪽을 선택했어요. 몸이 가벼운 편이라 그렇게 많이 뛰고 점프했는데도 하체부상은 덜했지만 대신 여기저기 크고작은 데미지를 꽤 입었습니다. 경기를 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물리적인 접촉이 반복되잖아요. 그러다 보니 무릎이나 다리 쪽에 멍이 들거나 어깨나 팔에 손톱자국이 되게 많았어요. 그런데 이것은 비단 저뿐만이 아니었을거에요. 센터 등 빅맨포지션은 골밑에서 싸워야 되니까 그것을 저지하려는 상대 선수들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죠.

Q.만약 선배 정은순, 유영주처럼 탄탄한 몸과 강한 힘을 가졌다면 블록슛 기록이 더 늘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제가 팔이 길고 탄력이 좋아서 블록슛하기 좋은 체형이었다고 생각해요. 다른 선수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 몸이 딱 플레이하기 좋았죠. 몸이 가벼우니까 점프도 자주 할 수 있고 스피드도 있어서 이른바 쫓아가면서 시도하는 블록슛도 능숙했지 않나 싶습니다. 가벼운 체형이 아니었다면 몸싸움에서는 조금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파울갯수가 훨씬 늘어났을 것 같아요. 그렇지않아도 많은 편이었지만요.(웃음)

Q.2009~2010시즌 35경기 연속 블록슛을 기록하셨어요.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록에 대한 의식은 되지 않으셨나요?
당시에는 기록 자체도 잘 몰랐어요. 딱히 누가 말해주지도 않았고요. 차라리 그런 쪽이 더 낫다고 봐요. 무엇인가를 의식하지 않는 성격이라 해도 주변에서 자꾸 언급하고 화제가 되기 시작하면 부담감이 밀려올 수도 있거든요. 다행히(?)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고 무심하게 뛸 수 있어서 한참 동안 기록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은퇴시즌까지도 블록슛 1위를 차지하셨어요. 현역 연장에 대한 미련은 없으셨나요?
은퇴 직전까지도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어요. 외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에는 체중까지 늘기 시작해 몸에 힘까지 붙어가는 와중이었죠. 조금 욕심을 낼 수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농구 이외에 계획하고 있었던 것도 있었고요. 무엇보다 예전부터 ‘박수 칠 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어요. 부상으로 혹은 기량이 떨어져서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모습보다 살짝 아쉬울 때 내려오는 것도 멋있잖아요. 잘한 선택 같아요.

 


“러시아전 결승골요? 경기가 끝난줄도 모르고 백코트했어요”

Q.실업 시절이기는 했지만 소속팀 SK증권이 우승과 함께 팀이 해체되며 충격이 있었을 것 같아요.

언니들부터 동생들까지, 차이만 있을 뿐 충격이 컸었죠. 한번 팀을 들어오게 되면 좀처럼 바뀌지 않던 시절이었잖아요. 우리 팀이라는 개념이 유독 강했던 시절이었어요. 저역시 그때 4년차에 들어가던 시점이었는데 한창 경기를 많이 뛰어야 되던 상태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언니들 같은 경우 오죽했겠어요. 사실 그때 ‘농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어요. 꼭 해체 충격 때문만은 아니고요. 이래저래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할까요. 저는 농구를 해오던 과정이 참 많이 힘들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농구를 시작한 케이스도 많은 상황에서 한참 늦게 농구의 길에 입문하다 보니 기본기가 딸려서 고생을 많이 했죠. 어쩌면 제가 블록슛 등 특정 기술에 더 특화된 배경에는 그러한 이유도 컸을 것 같아요. 이것저것 고르게 잘하기에는 경험이나 시간이 많이 부족했어요. 더불어 높이뛰기는 개인 운동이잖아요. 단체 운동인 농구에도 완전히 적응한 시기가 아니었구요. 당시에도 힘들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정말 힘들었겠다 싶어요.

Q.우리은행 시절 타미카 캐칭과 함께 전성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캐칭과 환상의 호흡을 선보였어요.
저도 젊은 시절이었지만 캐칭은 루키나 다름없는 상태였어요. 운동능력, 탄력 등에서 굉장했죠. 거기에 잠재력이 풍부했어요. 신체조건과 파워, 스피드 등을 고르게 갖춘 선수인지라 어느 포지션에 들어가도 제 몫을 해줄 수 있고 팀에도 빠르게 녹아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보니 함께 뛰면 정말 편해요. 캐칭이 공격을 하면 제가 리바운드를 잡아주고, 캐칭이 리바운드를 하면 제가 속공을 달려주고 호흡이 잘 맞았죠. 저는 육상을 해서 그런지 달리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기본기가 부족해 다양한 스킬로 승부를 보기보다는 많이 달리면서 받아 먹어주고, 적극적인 점프를 통해 제공권에서 도움을 주려고 했죠. 외국 여자 농구선수 같은 경우 어릴 때부터 남자들과 섞여서 농구를 즐기고 그런 케이스가 많다고 하던데 캐칭 역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몸싸움, 힘이 좋아서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파워풀하고 강력했어요.

Q.앞서 언급한 캐칭을 포함해 함께 뛰어본 외국인선수 중 최고라고 생각되는 선수는 누구일까요?
하핫…, 캐칭이 포함된다면 캐칭이 최고였죠. 여자 농구 외국인선수 중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케이스는 아주 드물잖아요. 아주 많이 잘했죠. WNBA에서도 정규리그, 파이널 MVP를 모두 차지한 레전드구요. 그런 선수랑 함께했다는 것이 참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선수는 삼성으로 이적했을 때 함께 뛰었던 백인 센터 로렌 잭슨이에요. 농구를 참 예쁘게 했던 선수였어요. 코트 밖에서는 동료들과 잘 지내고 코트 안에서는 열정 넘치고 예쁜 농구를 했죠. 센터였지만 외곽에서 3점슛도 가능하고 다방면으로 센스가 뛰어났어요. 198cm의 장신인데도 얼굴도 아주 예뻤어요. 모델 활동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다 가졌던 선수로 여기저기서 부러움을 샀죠. 뷰티(이종애), 레슬리(박정은), 바니(변연하) 등의 애칭으로 저희들을 불러주기도 했어요. 캐칭같은 경우 여성적인 면과 남성적인 면이 두루 섞인 중성적인 매력이 돋보였어요. 반면 잭슨은 천상 여자같다는 느낌이 많이 줬던 것 같아요.

Q.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조별예선 러시아전에서 종료 직전 결승골을 넣으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어요.
그땐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저희가 지고 있을 때 제가 투입되었던 것인지라 죽어라 뛰어다니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대표팀에서 어린 축에 속하는지라 출장시간이 얼마나 되던지 간에 주어진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있는 힘껏 뛰어다녔죠. (정)은순 언니, (정)선민 언니가 메인이었고 제가 뒤를 받치는 쪽이었어요. 제가 은순 언니 볼을 잘 받아먹는 편이었어요. 언니는 패스를 잘하고 저는 잘 뛰어다니니까요. 그때도 은순 언니의 패스를 받아서 골을 넣었어요. 정신이 정말 없었던지라 종료 직전인지도 인지하지 못했어요. 영상 보시면 아시겠지만 골을 넣자마자 다시 뛰어서 백코트를 제일 먼저 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러시아 선수들이 안오더라고요. ‘왜 안 오지?’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경기가 끝났더라고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이종애를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은퇴 후에도 바쁘게 생활하고 있고 어떤 자리에 가더라도 준비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팬분들을 만나 뵙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은퇴 후에도 많은 분들이 기억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한 마음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체육관에서 뵐 날을 기대해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일 많으시기를 기원드릴께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점프볼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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