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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왈순 아지매 |
김영기는 『갈채와의 밀어』에 어린 시절의 삽화를 여럿 소개했다. 소년 김영기는 개구쟁이였던 것 같다. 성격이 활발한 소년들이 대개 그렇듯이 운동을 좋아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무슨 운동이든지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사실 김영기는 왜소한 소년이었다. 키가 작아 학급에서는 늘 앞줄에 앉았고 체격도 약한 편이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운동신경만은 남달랐다. 운동을 하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김영기는 ‘광기’라고까지 표현했다.) 쉽사리 충족되지 못했다. 학교 운동부 같은 곳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김영기가 울분을 삭인 곳은 동네 골목이다.
김영기의 오랜 친구 중에 정운경이 있다. 「왈순 아지매」라는 네 컷짜리 신문 시사만화로 유명한 그 정운경 화백이 어린시절 김영기의 단짝이었다. 김영기가 서울 초동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할 때 정운경은 이미 그림에 미쳐 있었다고 한다. 어린이들은 대개 그림을 좋아하고 만화라면 사족을 못 쓴다. 운동 좋아하는 김영기도 어릴 때는 정운경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무슨 그림인가. 동네 왈패들 중에서도 가장 미운 녀석을 골라서 남의 집 담벼락에 가능한 기술을 총동원해 추한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거기다 ‘XXX는 나쁜 자식’이라는 설명까지 친절하게 덧붙였다. 그리고는 냅다 달려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김영기와 정운경이 왕성하게 창작열을 불태우는 바람에 동네 골목 담벼락에는 빈자리가 남지 않았다. 말하자면 소년 작가들의 상설 가두전시가 초동 골목을 장식한 것이다. 두 사람은 골목그림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어설프게나마 스토리를 꾸며내 만화책을 만든 다음 독자들에게 보급했다. 독자들이란 다름 아닌 동네 꼬마들이었는데, 두 어린이 화백은 기특하게도 구독료를 면제함으로써 아동복지에 기여했다. 만화 내용이나 형식이야 오죽했겠는가. 크레용을 덕지덕지 바른 종잇장 위에 김영기와 정운경은 언제나 정의의 사자로 등장한다. 담벼락을 장식한 그 미운 친구는 물론 악당 역할을 면하기 어렵고.
두 사람이 함께 같은 일을 해도 재능의 차이는 엄연했다. 김영기와 정운경이 그림 장난을 할 때, 언제나 정운경의 그림이 돋보였다. 하지만 몸을 쓰는 장난이나 놀이에서는 정운경이 김영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 같은 놀이를 하면 잽싸고 정확한 김영기가 무조건 이겼다. 끝날 때쯤엔 항상 김영기의 주머니가 두둑했다. 짓궂은 두 소년은 딱지놀이나 구슬놀이에 쉽게 싫증을 냈다.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을까. 그들은 ‘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놀이를 개발해냈다. 진흙 범벅이 된 고무공을 골목 어귀에 놓고 기다렸다 예쁜 여성이 지나갈 때 발로 차서 궁둥이에 명중시키는 장난을 했다. 언젠가는 대가를 치를 게 분명했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악동 김영기와 정운경은 진흙덩이인지 공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을 대령해 놓고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닥칠 운명을 짐작조차 못한 채, 저쪽에서 대학생인 듯한 젊은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예뻤다. 젊은 여성은 천천히 걸어 악동들 앞을 지나쳤고, 이내 등허리가 훤히 드러났다. 냅다 차낸 진흙투성이 공은 정확하게 날아가 젊은 여성의 엉덩이에 명중했다. “백보드도 림도 맞지 않고 들어가는 클린 슛!” 김영기는 매우 만족했지만 도망가야 할 타이밍을 놓쳤다. 정운경은 눈치 빠르게 골목 저편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김영기는 재빨리 몸을 돌이켰지만 이미 늦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우람한 손아귀가 김영기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김영기는 꼼짝 못하고 피해 여성 앞에 끌려갔다. 그 아름답고 젊은 여성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와중에도 김영기는 여성의 궁둥이를 살피며 자신의 정확한 솜씨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다. 젊은 기사(騎士)의 손아귀에서 옴짝달싹 못하던 김영기는 마침 골목을 지나가던 경찰에게 인도되었다. 경찰은 김영기 소년의 뛰어난 솜씨를 칭찬(?)했지만 책임은 물었다. 결국 김영기는 즉결심판에 넘겨졌는데, 형의 집행도 경찰이 맡았다. 경찰은 까까머리 소년에게 꿀밤을 몇 대 놓아 줌으로써 훈육의 책임을 다했다. 짓궂었지만, 이런 장난으로도 김영기는 만족할 수 없었다. 무조건 운동을 하고 싶었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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