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젊은 선수들은 존 번을 맞이하기 위해 김포 비행장에 나갔다. 그들은 ‘Welcome Mr. Bunn!’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학생들은 존 번이 키가 후리후리하고 풍모도 근사하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비행기 트랩을 내린 사람 중에 건장한 사람들은생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를 본체만체 지나쳐 비행장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비행장은 이내 한산해졌다. 플래카드를 든 학생들 앞에서 체구가 작고 아주 볼품없는 중늙은이 한 사람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존 번이었다. 한국의 유망한 대학선수들과 미국농구를 대표하는 위대한 농구인의 첫 만남이었다.
김영기는 존 번이 일반 실업팀 지도를 거절하고 대학생을 지도하겠다고 나선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실 번은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실업농구팀을 프로팀이라고 생각했다. 김영기를 비롯한 대학선수들로서는 번이 학생 팀 지도를 선택한 것이 행운이었다. 김영기는 『갈채와의 밀어』에서 “존 번의 합동지도가 있은 뒤부터 대학 농구는 중흥의 깃발을 높이 들고 한국 농구 개혁의 선봉이 되었다.”고 적었다.
김영기가 말한 한국 농구의 개혁 작업은 번의 파격적인 지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농구의 이론을 공부하는 오전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한국의 대학생 선수들이 알고 있던 농구는 뛰어난 팀워크와 개인기술로 이루어지는 실기 중심의 농구였다. 그러나 존 번의 주장은 달랐다. 그는 실기 훈련에 앞서 이론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지론을 펼쳤다. 번은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줄곧 오전 시간을 이론 강의에 할애했다.
선수들은 대부분 짜증을 냈다. 김영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리타분하게 필기나 해가면서 어떻게 농구의 이론을 공부한다는 거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학생들은 백 가지 이론을 알아도 한 번 실제로 연습해 보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부분 이론 강의를 들으러 나가지 않았다. 학생들은 나중에 알았지만, 번은 이러한 선수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 두었다. 번이 기술에 앞서 이론, 플레이에 앞서 성실한 인간형성에 주력했다는 사실을 김영기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존 번의 지도는 오후에 하는 실기 훈련 때도 파격적이었다. 당시 학생 선수들 가운데에는 대표 급 선수인 황태석, 김영수와 동일하게 평가받던 연세대의 조병현과 최태권이 있었다. 번은 이들을 한 마디로 ‘해치웠다.’ 기초기술부터 전반적으로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당시 랭킹으로 따지자면 상위 급으로 평가받지 못하던 김춘배와 염철호 등을 우수한 선수로 꼽고 베스트 멤버로 기용했다. 학생 선수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잘한다고 생각되는 선수들은 제외되고, 잘하지 못한다고 본 선수가 오히려 존 번의 베스트 파이브로 기용되었기 때문이다. 김영기도 얼른 수긍하지는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농구협회의 입장도 난처해졌다. 대학 팀에 미국식 농구를 주입하려다 오히려 한국 농구의 장래를 망친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영기에게 존 번은 어떤 코치였는가. 번은 그때까지 지도자와 주변인들에게 푸대접만 받아온 김영기의 새로운 플레이를 오히려 인정했다. 김영기의 재질을 칭찬하기도 했다. 그의 칭찬을 확신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김영기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존 번이 김영기의 도전적인 농구 기술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면 김영기는 한국 농구계의 이단자로 낙인찍혀 마침내는 버림받을 수도 있었다. 다만 번은 김영기의 작은 체격을 큰 약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김영기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농구선수로서 대성하리라는 예측은 하지 않았다.
존 번이 가르친 농구 테크닉은 어떤 것들일까. 번은 학생 선수들에게 패스워크를 위주로 한 안전하고 비(非)조직적인 경기 운영 방식을 모험적이고 조직적인 스타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또한 포워드는 공격, 가드는 수비만 하던 재래식 농구를 벗어버리고 팀 전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수비하는 스타일로 바꾸라고 했다. 드리블을 삼가고 패스만 하는 소극적인 공격을 지양하라는 번의 요구는 김영기의 새로운 농구 스타일과 일치하는 데가 있었다. 김영기는 쾌재를 불렀지만, 번이 줄곧 협회로부터 불신당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뻐기지는 못했다. 또한 김영기 자신으로서도 번의 지도 내용 중에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았기에 조금은 엉거주춤한 입장이었다. 존 번을 매우 훌륭한 코치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던 또 하나의 이유는 자신을 베스트 파이브에 기용하지 않았던 데 있었다. 김영기는 훗날 이 당시 자신의 생각이 ‘부끄럽다’고 반성했다.
존 번의 지도를 농구협회부터 선수에 이르기까지 불신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농구 기술을 우리 선수들이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데도 있었다. 이 사실은 김영기가 외국 팀을 상대로 경기한 최초의 경험인, 자유중국 대표 극난(克難) 팀과의 대결에서 한국 팀이 참패함으로써 선명하게 확인되었다. 김영기가 가장 짧은 시간 기용된 경기로 기억하는, 그 경기다. 내내 벤치만 달구고 있다가 경기가 끝나기 20초 전에야 코트를 밟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영기는 “나의 체격과 체력이 약하다는 번 씨의 평가가 그만 20초 선수로 만든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김영기는 극난 팀에 당한 참패의 원인을 재래식 한국 농구에 두 달 동안 배운 존 번식 미국농구가 ‘짬뽕’이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언제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이라는 것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가보다.”라고 썼다. 어찌됐든 한국 선수들은 이 어정쩡한 농구로 극난 팀에 두 번이나 참패를 맛봤다. 극난에 당한 두 차례 패배는 그렇지 않아도 존 번을 탐탁지 않게 보던 대한농구협회와 국내 농구인들의 맹렬한 비난을 불렀다. 번은 이렇게 순탄치 않은 석 달을 한국에서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기는 “그 분은 훌륭한 코치였다.”라고 잘라 말했다. 김영기는 존 번이 떠난 뒤에야 그가 펼쳐 보인 농구 이론의 진수를 이해하고 소화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 게임에 우리가 이긴다면 그것은 오직 여러분 선수들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뛰어 이겼기 때문에. 그러나 만약 진다면 그것은 오직 나의 책임입니다. 역량이 부족한 나의 코치가 여러분의 훌륭한 플레이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 말은 경기를 앞두고 존 번이 습관처럼 한 말이었다. 겸손한 그의 말은 코치로서의 깊이를 보여주고도 남았다. 훈련 때도 그랬다. 번은 당시 한국에서도 관심이 고조되어가던 체육과학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선수들의 어지간한 외상은 척척 치료하는 의사이기도 했다. 훈련이나 경기 중에 부상자가 생기면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적십자 백’(의료용 약품과 도구를 넣은 가방)을 열고 치료해주곤 했다. 그럴 때면 불만으로 입을 내밀고 있던 선수들도 불현 듯 친밀감을 느끼고 감동했다. 스리 맨 러닝 패스 훈련을 할 때 짝이 맞지 않으면 코트에 들어가 선수들과 함께 벅찬 뜀질을 하며 호흡을 맞추어 주기도 했다.
번은 ‘별명 붙이기’ 선수이기도 했다.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김-이-박’ 중에 하나가 맞는다는 말이 있다. 번으로서는 한국 선수들의 이름을 외우고 부르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한국 선수들에게 영어와 한국어가 뒤범벅된 별명을 선사했다. 김영기보다 키가 큰 김춘배는 ‘빅 킴’(Big Kim)이라고 불렀다. 덕분에 김영기는 ‘리틀 킴’(Little Kim)이 됐다. 턱이 우람한 강병권은 ‘조 강’(Jaw Kang), 나이보다 노숙해 보이는 백남정은 ‘그랜드팝’(Grandpop) 이런 식이었다. 이런 별명들이 심지어는 야단을 칠 때도 터져 나오곤 했다. 경기 직전에 외치는 구령도 재미있었다. 번은 한국 선수들에게 이렇게 외치도록 했다.
ALL FOR ONE, ONE FOR ALL, ALL FOR KOREA!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해서,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서, 모두는 코리아를 위해서!)
이렇게 존 번은 경기를 앞두고 한국 선수 모두에게 정신적인 결속을 요구했다. 김영기는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화려한 플레이보다는 정신! 승리의 플레이보다는 정신!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은 조국을 위해서 바치는 것!”
존 번이 한국을 떠난 뒤, 김영기는 번이 가르친 농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번의 강의를 받아 적은 노트들을 들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두 가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조건에 알맞은 농구를 창조하는 데 교과서로 삼았다. 그와 함께 노트를 꺼내 놓고 착실하게 연구를 시작한 선수가 또 있다. 김춘배와 백남정. 노트를 이해하고 익히기 시작한 그들은 이상하게도 그해 가을부터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김영기의 플레이에도 눈에 띄는 발전이 있었다.
그 뒤 김영기가 공군 팀에서 활약할 때 존 번이 미8군의 코치로 잠깐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다. 5년 만의 재회였다. 번은 자신을 찾아온 김영기에게 “하이, 리틀 킴! 톱 플레이어가 됐다면서? 정말 기뻐! 정말 장한 일이야! 그 키로 톱 플레이어가 됐다는 것은 무서운 노력이야(의 결과야)!”라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김영기는 그 천진스러운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는 자신을 성장시킨 숨은 공로자의 한 사람으로 존 번을 손꼽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