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점슛 농구? GSW보다 먼저 시작했죠”

김종수 / 기사승인 : 2021-12-20 22:25:16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김종수의 농구人터뷰(16)] '고졸 지도자 신화' 김태환

“고졸 신화? 뭐…,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따라다니던 이야기니까요. 그래도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달려왔다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농구인 김태환(71‧170cm)은 지도자 계에서 잡초로 불린다. 가정형편상 대학도 가지못하고 생계를 위해 20살의 어린나이에 초등학교 코치로 지도자로 첫 스타트를 끊은 이래 여자농구단 감독, 대학교 감독, 프로농구단 감독까지 36년가량을 농구를 가르치는 일에 매진해왔다. 그럴때마다 따라붙는 말은 ‘고졸이?’라는 말이었다. 칭찬, 놀라움, 황당함, 못마땅함 등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프로팀 감독을 맡을 무렵에는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서까지 그의 스토리가 소개되기도했다.


사실 고졸 신화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일지도 모른다. 대학이라는 곳이 더 많은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장이라는 사실은 맞다. 하지만 사람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재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느정도 평가요소로 작용될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의 능력을 확인한 후에는 학력은 의미가 없어진다. 무엇인가를 배우는데 있어서 불리한 요소를 이겨내고 올라왔던데에는 그 이상의 경험과 관록이 쌓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능력만되면 외려 고졸을 권장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예전에는 달랐다. 대학은 선수가 되기위한 필수코스였으며 지도자 등 은퇴 이후 인생을 생각하면 무조건 적으로 필요했다. 거기에 한국 사회 특유의 ‘내 사람 밀어주기’문화와 맞물려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에 따라 이후 행보가 엇갈리기도했다. 다들 기를 쓰고 좋은 대학, 주류대학을 가려는 이유가 있었다.


지도자 김태환은 그러한 부분에서 많이 불리했다. 밀어주는 이도 끌어주는 이도 없는 현실에서 더욱 이를 악물고 노력하고 결과로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이것이 김태환의 농구다’를 입증해냈다. 비록 SK 시절 이후 더 이상 지도자로서 나서지못했지만 이전까지 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슷한 환경의 후세대들에게 본보기가 될만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Q.어떻게 지내십니까?
특별할 것 없이 쉬면서 지내고 있죠. 가끔 등산다니면서 저녁에는 농구중계도 보고 그렇게 소일하면서 시간보내고 있습니다. 농구중계 같은 것은 자연스레 쭉 보게되더라고요. 아무래도 농구와 함께 살아온 인생인지라 지금 당장 저와 관련이 없어도 ‘현재는 누가 잘하나?’, ‘흐름은 어떻게 변하고 있나?’ 그런식으로 나름대로 분석도 해가면서 보고있습니다. 이건 저뿐만 아니라 농구와 오래지낸 사람들은 다 비슷할 것 같아요. 그냥 야인으로있어도 관심사는 농구로 가게되는 것 같아요.

Q.시간이 정말 빨리 가는 것 같아요. 건강 등은 괜찮으세요?
너무 건강해서 문제입니다. 아주 건강합니다.(웃음)

Q.개인적으로 응원하는 팀이 있으실까요?
개인적으로 응원하는 팀은 딱히 없고요. 사람이니까 경기를 보다보면 저팀이 이겼으면 하는 생각은 들때가 있죠. 하지만 정해놓고 응원하는 팀은 없다고 봐야겠죠. 그때그때 달라지니까요.

Q.요새 눈에 띄는 젊은 선수가 있으신가요?
글쎄요. 요새 좋은 신인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판도를 바꿀 정도는 아니고, 잘 성장하고있구나 정도 생각만 드는거죠. 그래도 요즘 대세는 허재잖아요. 허재의 아들들. 농구도 잘하고 인기도 좋고, 프로농구를 많이 알리고있잖아요. 인기도 실력인거죠. 이현중같은 선수는 외국에 있으니까 거기서 잘하기를 바랍니다.

“고졸 출신이라는 말은 어딜가나 늘 따라다녔습니다”

Q.중학교 때까지 야구를 하시다가 고등학교때 농구를 하셨어요. 아무래도 특기생으로 대학을 가시기에는 170cm의 작은키 더불어 짧은 구력이 문제가 되었을 것 같아요.
170cm가 아주 작은 키까지는 아니에요. 당시로 따지면 그게 딱 가드들 신장이에요. 지금 여자선수들 생각하면 될거에요. 고등학교때 농구를 하기는 했지만 횟수로는 4년 정도를 했어요. 한 학년 꿇었으니까요. 대학은 스카웃은 됐어요. 하지만 당시 여건상 가기가 어려웠어요. 당장 생활해야되는 문제도 있고 여러가지가 겹쳤다고 보는게 맞을거에요. 집안에 어머님하고 여동생만 있던 상황인지라 직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거죠.

Q.본래 야구를 하셨던지라 야구에도 관심이 많으실 것 같아요.
야구를 정식으로 했다기보다는 초등학교때 조금했고 연장선에서 이어나갔던 것이라 조금하고 말았던거죠. 아주 월등하게 잘했던 것도 아닌 상태에서 학교 성적까지 떨어지니까 집에서도 못하게 반대하고 그랬어요. 특히 야구는 장비가 많이 필요하잖아요. 돈도 많이 들어가요. 그런데 뭐가됐든 운동은 하고 싶었어요. 농구같은 경우는 야구처럼 장비가 많이 필요없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유니폼 한벌만 책가방에 숨기고 다니면서 몰래 농구를 하고 그랬어요. 농구를 가장 좋아하기는 하지만 지금도 야구에 관심많아요. 국내 야구는 물론 류현진 등판경기같은 것도 꾸준하게 시청하고 있거든요.

Q.20살에 화계국민학교 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하셨어요. 젊은 것을 넘어 어리다고까지 느껴지는 나이였어요.
그때는 다 그랬어요. 젊은 코치들이 많을 때에요. 학교 졸업하고 바로 코치하는 친구들이 드물지 않았어요. 직업 전선에 일찍 뛰어들었다고 보는게 맞을거에요. 생활이니까요. 지금하고는 환경이 많이 달랐어요.

Q.무학여중 코치 시절 자존심이 상한 일이 있었고 이후 이를 악물고 지도해 1976년 모든 대회를 전승 우승시켰다는 일화를 들었습니다.
처음에 무학에서 오라고해서 갔는데 오픈게임을 했어요. 잘하는 두팀하고 붙었는데 경기를 져버렸죠. 그러니까 교장이 오더니 ‘잘한다고해서 스카웃을 해왔는데 별로네’하면서 문책을 하더라고요. 자존심? 자존심도 상했지만 그보다는 저에게 코치는 생활을 위한 수단이기도 했어요. 더 이상 여기서 패가 쌓이면 자칫 잘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었어요. 먹고살려고 대학도 안간 상황인데요. 선수들과 함께 정말 열심히 했죠. 이기는 팀을 만들기 위해서요.

Q.어떻게 하셨기에 팀이 그렇게 확 바뀌게 된 것이죠?
사실 너무 여러곳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식’으로 너무 좋게 포장을 해주셨는데 사실 무학이 약한 팀이 아니었어요. 좋은 선수들, 가능성 있는 선수들도 꽤 있었어요. 저도 오기전에 살펴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큰 팀 같다는 판단이 서더라고요. 잘 가르치면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가게 된 것이고요. 팀이 바뀌었다기보다는 가능성있는 선수들을 데리고 열심히 함께 해서 자연스레 전력이 올라갔다고 보는게 맞을거에요. 또 그때는 무식한 시절이었어요. 훈련량이 정말 많았거든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간도 오래쓰고 체력훈련도 많이했어요. 그런 것이 통한 것 같아요. 과거에는 어느 팀이나 훈련량이 참 많던 시절이었어요. 저역시 비슷한 선상에서 훈련을 많이시켰고요. 부족한 지도자지만 선수들이 믿고 잘 따라줘서 좋은 성적이 났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 생활을 돌아보면 어디에 있었던지간에 선수들에게 참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

Q.1983년에는 바레인으로 건너가서 농구 코치를 하시기도 했어요.
저만 특별히 간 것은 아니고요. 그때도 국내 지도자들이 해외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당시에도 바레인에서 초청을 해가지고 7~8명이 이곳저곳으로 한꺼번에 갔던 상황이에요. 국가대표 출신 김철갑 선수나 기타 선배들도 있었고 저보다 이름값이 높거나 나이많았던 사람들도 함께 갔어요. 저같은 경우 해외경험도 쌓을 수 있고 보수도 나쁘지 않았던지라 안갈 이유가 없었죠. 가보니 국내와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고요. 문화나 환경도 다르고해서 국내에서 하듯이 하면 안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이미 예상했던 것이고 무엇보다 영어가 시원치않아서 처음에 조금 고생을 했죠.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배울 상황이 아니었죠. 그냥 열심히 현장에서 듣고 배웠고 사전을 국어책 읽듯이 맨날 외웠죠. 그때 영어가 꽤 많이 늘었어요.

Q.국민은행 여자 농구단 시절에도 두차례 우승하는 등 있는 전력에 비해 더 좋은 성적을 내시는데 일가견이 있으셨어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일가견이라기보다는 그냥 열심히 훈련한 것 뿐이에요. 열심히 하지 않는 팀이나 선수가 어디 있었겠냐마는 남들보다 더 긴시간 동안 훈련을 하려고했고 그러다보니 결과로 나타난 것 같아요. 그냥 스파르타식 훈련이었던것이죠. 거기에 정신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무장시키려고 노력했고요. 어찌보면 조금 비 신사적인 스타일이었던것도 같아요.

 

 


Q.여중, 여고, 여자농구단 등 여자농구쪽에 오래있으셨잖아요. 아무래도 남자선수들과 여자선수들은 소통하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아무래도 여자선수들은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넣어주는 과정까지 들어가야하고, 남자선수들은 그정도까지는 필요없다는 차이점이 있더라고요. 오해하지는 마세요. 일반화를 시키려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입니다. 여자부를 먼저 하다보니 남자부를 할 때 도움이 많이됐어요. 같은 성별이 아닌지라 여자선수들은 좀더 신경을 많이 쓰고 생각을 하면서 대해야 될때도 많았습니다. 그런 경험이 쌓인 이후 남자팀 감독을 할 때는 편한 부분도 있더라고요. 좀더 섬세하게 가르치게 되었다고 할까요. 생각해보면 제가 선수복이 나쁘지않았어요. 좋은 선수들을 데리고 좀더 열심히 많이 훈련하고 거기에 저만의 노하우가 쌓이다보니 좋은 성적이 났던 것 같습니다. 사실 여성부를 할 때 제가 맹장 스타일이기는 했어요. 훈련하고 경기하는데 있어서 만큼은 거친 부분이 많았죠. 남성부로 갔을 때는 이미 소문이 다 나버려가지고 알아서 말을 잘듣더라고요. 외려 중앙대나 프로시절에는 편한(?)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Q.고졸임에도 중앙대학교 감독을 하셨어요. 뭐랄까,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어디에 갈 때마다 ‘고졸 출신’이다는 말이 이슈로 따라다녔어요. 대학팀 갈 때도 그랬고, 프로팀도 그랬고. 어찌보면 그렇게 화제가 되는 것도 참 옳지 못한 현상같아요. 어느 종목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간판보다는 실력으로 승부하는게 맞잖아요. 그전에 전혀 검증이 안된 것도 아니고요. 인간 승리처럼 표현된다는 것이 어찌보면 참 머쓱했다고 할까요. 어쨌든 그렇게 버티고 살아왔는데 적들도 많았어요. 국내같은 경우 학벌이 참 중요하잖아요. 저로서는 늘 그런 핸디캡을 안고 평생을 걸어온거죠. 축구 박종환 감독도 그렇고, 야구 김성근 감독도 그렇고 비주류로 주류사회에서 경쟁한다는 것은 늘 가시밭길이에요. 음지에서 컸기 때문에 불이익도 많았죠. 80년도에 청소년 대표 맡아서 우승을 했고 94년도에 히로시마 대표팀에 코치로 갔었고 나름 과정을 밟아가며 증명해나갔지만 학벌, 인맥의 벽은 참 뚫기가 힘들더라고요. 사람들이 나빠서 그렇다기보다는 이왕이면 내 사람을 더 챙겨주려고 하고 내집단이 우선이고, 우리들 살아가는 풍토가 그런거죠. 어쩌면 그런 것을 일찌감치 인정했기에 고군분투하면서 더 강해질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하고요.

Q.당시 중앙대처럼 강한 전력의 팀을 맡으신 것은 처음이셨죠?
이전에도 괜찮은 팀을 종종 맡았지만 아무래도 당시 중앙대학교가 멤버가 워낙 좋기는 했죠. 기본적으로 김주성, 송영진같은 선수를 데리고 농구하게 되면 얼마나 편해요. 그야말로 대학무대에서는 절대 강자가 되는 것이죠. 둘다 높이는 물론이거니와 스피드까지 갖춘 선수들 아닙니까. 그런 두 선수가 골밑을 넓게 오가며 리바운드하고 블록슛만 해줘도 다른 포지션까지 끼치는 시너지 효과가 엄청나죠. 물론 김주성, 송영진은 영리하고 기술이 좋아서 득점이나 패싱플레이까지 잘했고 나머지 포지션에도 임재현, 박지현, 황진원같이 빠르고 재치있는 가드, 조우현, 신동한 등 빼어난 슈터 등이 버티고 있어 말 그대로 퍼즐이 척척 맞아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선수들이 제 지도방식을 잘 따라주며 훈련까지 열심히하고 조직력도 잘 맞춰들어갔으니 성적이 안날 수가 없었죠.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않지만 거의 모든 경기를 다 이기고 1패인가만 하고 중앙대를 나왔던 것 같아요. 그 1패인가로 인해 준우승이 한번 있었죠.

 

 

“시기만 놓고보면 골든스테이트보다 빨리 시작했죠”

Q.감독님하면 창원 LG 시절이 역시 가장 유명합니다. 당시 파격적인 공격농구로 유명하셨는데요. 색깔을 구분하자면 3점농구일까요? 속공농구일까요?
그게 일단은 3점 농구보다는 속공을 위주로 한거죠. 빨리 가다보니까 찬스가 나고 그러다보니 3점슛도 많이 쏘게된거죠. 하지만 조성원, 조우현, 에릭 이버츠, 이정래 등 선수 구성도 그렇고 실제 3점슛 성공갯수도 많고하니까 사람들 눈에는 3점 농구가 더 눈에 크게 들어오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게 3점을 많이 쏘고 성공시키는 팀이 그동안 없었으니까 신기하기도 했을 것 같아요. 요지는 속공 농구에 3점을 덧입혔다고 하는게 맞을거에요. 그러한 농구를 하려는 과정에서 입맛에 맞는 선수들을 데려다가 구성을 했다는 것도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Q.최근 NBA에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중심으로 3점농구가 유행하고 있죠. 사실 그부분에있어서는 감독님이 더 빨랐던 것 같아요.
허허헛…, 단순히 시기만 놓고보면 맞습니다. 제가 더 빠르긴했죠. 당시 LG 그리고 현재 NBA 골든스테이트 둘 다 자신들만의 확실한 팀컬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농구는 다양한 색깔이 존재하는지라 어떤 것이 맞다 아니다로 평가할 수는 없겠죠. 다만 예나 지금이나 빠른 농구는 상당수 팀들이 선호하는 방식이었고 지금은 골든스테이트로 인해 더욱 대세가 되었다는 사실이겠죠.

Q.당시 LG는 ‘닥공’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반면 수비는 조금 약해보였어요.
수비 중요하죠. 수비를 잘하는 팀이 강팀인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LG가 매우 적극적으로 공격에 임하는 팀이기는 했지만 수비를 안하는 팀은 아니었어요. 다만 공격횟수를 다른 팀보다 더 많이 가져가다보니까 상대적으로 실점도 늘어나게 됐고 수비가 약하게 보인 면도 있지않나싶습니다. 대신 득점 공방전에서 이겼기에 승리도 많이 쌓아나갈 수 있었던 것이죠.

Q.그러한 외곽 농구, 공격 농구는 프로에 오기 전부터 생각하고 계셨던 스타일인가요?
신념처럼 가지고 다니면서 구상한 정도는 아니고 팬들이 좀 더 열광하고 재미있어하는 농구는 득점이 많이 나는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여자농구 시절 제가 이끌던 팀보다 더 전력이 좋았던 팀을 상대로 어떻게하면 승리를 가져갈 수 있을까 다각도로 고민해봤어요. 여러 가지 수비전술을 구상하며 수비 농구로 가보려는 시도도 종종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내린 결론은 좋은 선수가 있으면 그 능력치를 최대한 풀어놓을 수 있게 공격 쪽에서 패를 많이 깔아놓는게 좋지않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내가 맡고 있는 팀에 공격이 좋은 선수가 없다면 당연히 지키는 농구쪽도 비중을 많이 둘겁니다. 공격쪽에서 화력이 딸리는데 일단 막아내는데 집중해야죠. 좋은 공격수들을 보유하고도 수비위주로 간다면 망하는 지름길이잖아요.(웃음)

Q.다수의 슈터를 앞세운 공격력은 좋았습니다. 다만 게임조율능력이 뛰어난 선수와 수비의 중심을 잡을 선수가 부족했지않나 싶어요.
맞습니다. 때문에 수비 쪽에 능력있는 선수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노력했어요. 팀 전체가 수비가 강하지는 못해도 그런 수비 기술자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했죠. 예를 들어 상대팀에 김승현이 있어요. 김승현 손끝에서 여러 가지가 만들어지잖아요. 절대적으로 막아야죠. 그럴때는 맨투맨 수비에 강한 박규현을 스타팅으로 기용해서 김승현 스토퍼로 내세우는거죠. 김승현만 어느 정도 제어시켜도 상대 팀의 강점이 많이 흔들리게 되잖아요. 맞춤형으로 가는거죠. 상투적인 말일 수도 있겠지만 상대팀은 상대팀대로 잘하는게있고 우리팀은 우리팀대로 장단점이 있는겁니다. 상대의 잘하는 쪽을 최대한 못하게하고 우리팀의 색깔을 잘 살리는 쪽이 경기는 이기게 되어 있는 것이죠.

Q.조우현 선수의 1번 기용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던데 감독님 입장에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전 인터뷰에서 조우현 선수도 언급한게 있었거든요.
확실한 주전급 1번이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그 자리에 가드를 놓고 구색을 맞추기보다는 잘하는 선수를 선봉에 세우는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우현 선수가 포지션은 포워드지만 슛도 좋고 드리블도 좋아요. 볼도 빨리 빨리 돌리고요. 어지간한 가드보다 그 역할을 잘해낼 수 있는데 포지션 맞춘다고 가드를 고집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전체적인 신장도 올라가게되고 상대팀의 수비부담도 높일 수 있고, 이래저래 플러스 요인이 더 많다고 생각하니까 조우현을 1번으로 기용하게 된 것입니다. 중앙대 시절 가르쳐봤던 제자라 잘아는 부분도 있고요. 이렇게도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이른바 운영의 묘를 살려보는 것이죠. 그렇다고 실패한 것은 아니거든요. 그때는 생소해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그렇잖아요. 포지션별 분배보다 팀에 더 도움이 되는 조합이나 밸런스를 선호하는 팀이 늘어나는 추세죠.
 

 


“미나케가 부상당하는 순간,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Q.LG 시절에 이어 다시 한번 SK에서 공격농구를 시도하셨어요. 문경은-방성윤의 이른바 MB포는 제대로만 가동되었더라면 과거 LG 시절 조-조 쌍포에 버금갔을 것 같아요.
거기서 실패했다는 소리가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좀 억울합니다. 게이브 미나케가 3게임만에 부상으로 이탈한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습니다. 우승할 수 있었던 전력이 박살이 나면서 모든 팀플랜이 어긋나버렸던거죠. 6강도 못가고요. 미나케와 함께 뛸 때 3전 3승을 하다가 엄청난 암초를 만나서 배가 전복되어 버렸습니다. 4번째 게임에서 미나케가 그렇게됐으니까요. 사실상 김태환 농구 인생은 거기서 끝이 나게 된 것이죠. 참 운이 없는게 우승을 위해서 미나케와 방성윤을 데려왔습니다. 미나케는 대퇴골부상으로 시즌아웃되고 방성윤은 시즌 개막 일주일 앞두고 상무와의 연습경기에서 눈을 다쳐버렸습니다. 원투펀치가 아웃되어버리니까 손쓸 방법이 없더라고요. 농구 팬들은 아실거에요. 미나케와 방성윤이 건강하게 동시에 뛰었다면 어떤 위력이었을지. 거기에 문경은도 있었잖아요. 정말 확실한 공격 농구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던지라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습니다. 미나케의 부상과 함께 우승후보가 6강도 못가보고 7위에 그치고 그 다음 시즌에 몇게임 해보지도 못하고 목이 날아간거죠.

Q.미나케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그전에 다른 팀에서도 그렇고 부상으로 풀시즌을 뛰지를 못하네요. 기량은 특급이었지만요.
그 선수가 실력은 좋지만 단점이 항의를 많이하는거에요. 다혈질에 승부욕도 강하죠. 저도 그점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영입할 때 각서 비슷하게 쓴게 있어요. 지나친 항의 등으로 경기에 영향을 끼치고 팀을 어렵게 하지 말자고요. 항의를 아예 안할 수는 없겠지만 테크니컬 파울 등은 먹지말도록 하자고 거듭 강조했어요. 미나케도 받아들였고 실제로 짧은 경기 동안 정말 잘해줬어요. 그런데 부상이라는 예상치못한 변수가 터져버렸죠.

Q.LG시절에도 그랬고 SK에서도 그러셨고, 이른바 필요하다 싶으면 판을 갈아엎는 수준으로 팀을 바꾸셨어요.
맞습니다. 저같은 경우 필요하다면 간판 선수도 트레이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선수보다 팀이 먼저니까요. 눈치보지않고 과감하게 제가 추구할 수 있는 농구를 하고싶고 그러려면 거기에 맞는 선수들이 필요하죠. 물론 이게 감독이 하고 싶다고 무턱대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구단에서 그 뜻을 받아주며 도와줘야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사 사인이 없으면 불가능하죠. LG시절에는 당시 김인양 단장이 많이 힘을 실어줬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도 과감성과 결단력이 남달랐어요. 제가 ‘A를 B로 바꿔야합니다’하고 의견을 내면 흔쾌히 받아줬죠. 감독 입장에서 원하는 색깔을 내게해주니 당연히 신바람이 났습니다. SK에서도 그런 성향은 그대로였죠. 방성윤이라는 카드를 데려오기위해 여러명 선수를 내주고 그랬잖아요. 지금도 저만큼 트레이드를 과감하고 활발하게 했던 케이스는 드물거에요.

Q.정은 많으신 성격같지만 경기장에서는 엄한 스타일이셨어요. 때로는 작전타임때 특정 선수를 향한 격한 말도 서슴치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되요.
제가 무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엄하게 다루려는 의미가 컸죠. 저를 잘 아는 이들은 사람 자체는 그렇게 무섭지 않다는 것을 알거에요. 느낌이라는게 무섭다고 느끼면 무서운거고, 그렇지않으면 않은거죠.

Q.김일두 선수가 지시대로 잘 안하자 작전타임때 “너 제주도에 있는 고구려대 나왔냐?”고 말씀하셨어요.
일종의 자극을 주기 위한 방법이었죠. 충분히 잘 알아듣고 할만한데 도통 어긋나게 플레이하니까 ‘남들이 다 인정하는 좋은 학교 나와가지고 왜 그러는거야?’를 돌려서 표현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 말을 할 당시에는 고구려 대학교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응원해주셨던 팬분들이 계셨기에 지난 날을 회상하며 웃을 수 있습니다”

Q.해설자로도 인기를 끌었어요. 중간중간 반말도 섞여나오고 이른바 콩클리쉬도 막 튀어나오셨는데 외려 정이 간다는 반응도 많았죠.
허헛…, 감사합니다. 반말이 섞여나온 것은 잘못된거죠. 정신없이 경기에 몰입하다보니까 감독시절로 빙의해서 지나치게 열정이 넘쳤던 것 같습니다. 콩클리쉬라고하는 부분은 영어를 할 때 습관적을 엑센트를 강하게 넣어서 그랬나봅니다. 어쨌든간에 잘한 것은 없는 부분인데 정이 간다고 말씀해주셔셔 감사하고 죄송하고 그렇습니다.

Q.엄청난 양의 정보를 직접 수기로 작성하시는 등 준비를 매우 철저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농구에 대한 자료 정리는 물론이고 좋은 말도 인용하기 위해서 당시에 책도 많이 사서 공부하고 그랬어요. 사자성어, 누군가의 명언 등 ‘이 말은 정말 좋은 말이다’싶으면 밑줄 쳐놓고 외우고 그랬죠. 단순히 경기에 대한 해설뿐 아니라 여러 가지를 팬들과 공감하고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Q.외모나 말투가 배우 ‘주현’님을 연상시킨다는 말씀 들어보셨나요?
네. 저도 알고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가끔 계시더라고요. 말을 느리게하는 그런 부분이 닮았다고 하던데 미디어에 노출되다보면 여러 가지 평이 나오고 그런거죠.

Q.마지막으로 여전히 감독님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팬분들에게 인사말씀 부탁드릴께요.
사실 감독 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있습니다. 지금은 나이를 먹어버렸지만 마지막 감독 생활 기준으로보면 좀 빠른 부분도 있었거든요. 본의아니게 은퇴를 하게된거죠. 은퇴라는 표현이 좀 그럴 수 있지만 유종의 미라는 부분에서는 두고두고 마음 한 쪽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SK시절 미나케의 예상치못한 부상으로 덩달아 제 감독생활도 마무리 되어버렸죠. 그뒤로는 아무팀도 가지못했잖아요. SK한테도 할말이 많고 당시 이야기를 하면 농구계가 발칵 뒤집힐 수도 있어요. 그때의 억울함을 안고 살아오다가 이제는 추억으로 간직해야되는 시점까지 오게되었네요. 적어도 한번 정도는 컴백을 해서 팬 여러분들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싶은 마음을 가졌던 적도 많았습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을 안고 지내고 있다고보는게 맞을 것 같아요. 어쨌거나 이제껏 감독 생활하면서 응원해주시고 함께 해주셨던 팬 분들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저역시 지난 순간을 회상하며 웃을 수 있는 부분도 많은거고요. 늘 건강하시고 좋은일 많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KBL 제공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종수 김종수

기자의 인기기사

JUMPBALL TV

오늘의 이슈

점프볼 연재

더보기

주요기사

더보기

JUMPBALL 매거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