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9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은퇴 선언 후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농구교실 준비하느라 바빴을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준비한 건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구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은퇴를 결심한 후 바로 실행에 옮겼다. 정신없는 3개월을 보냈지만, 직접 농구교실을 운영해 보니 기대했던 대로 적성에 잘 맞는다. 즐겁게 일하면서 지내고 있다.
지난해 FA 협상 기간이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것 같다. DB로부터 연락이 오기 전까지 제안을 못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큰 부상을 당했고, 그 여파로 쉽지 않은 상황을 맞았다. 돌아보면 삼성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발등부상을 당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가뜩이나 FA 앞두고 퍼포먼스가 안 나오고 있는데 수술까지 받으며 시즌아웃됐다. 리스프랑(발가락 위쪽에 있는 발등 부위 족부) 골절이었는데 흔치 않은 부상이라고 들었다. (이)현중이가 NBA 드래프트 도전할 때 당한 부상과 같은 부위였다.
현역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DB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클 것 같다.
계약을 제안하셨을 뿐만 아니라 개인 훈련을 마친 후 늦게 합류해도 괜찮다며 배려해 주셨다. ‘잘 뛸 수 있을까?’라는 불안한 마음이 컸는데 다행히 복귀 후 훈련을 해보니 생각보다 몸 상태가 좋았고 통증도 없었다. 마지막 시즌을 부상 없이 마무리한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마무리를 잘할 수 있게 도와준 DB에 감사할 따름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신인 드래프트 1순위(2012년)는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영예다.
너무나 큰 영광이다.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도 큰 자부심이 될 것 같다. 모비스(현 현대모비스)와 삼성에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1~4순위 확률은 모비스만 있었다. 당시 순위 추첨은 드래프트 10분 전에 진행됐다. 모비스가 1순위가 나왔을 때 설마했는데 10분 사이에도 주위에서 귀띔해 주셨다. 그래서 기대하긴 했지만, 실제로 이름이 불리니 얼떨떨했다.
“센세이션을 일으키겠다”라는 포부를 밝혔지만, 데뷔 시즌은 적응하는 데에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센세이션을 일으키긴 했다. 욕먹는 걸로…(웃음). 프로의 벽을 실감했다. 훈련이 체계적이긴 했지만, 훈련량이 너무 많아서 몸이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시즌 시작할 때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란 걱정이 앞설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즌 초반에 퍼포먼스가 안 나왔다. 점점 출전시간이 줄어들었는데 그게 전화위복이 됐다. 시즌 도중 개인 훈련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다 보니 몸이 확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5라운드부터 챔피언결정전까지 좋은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터닝포인트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함)지훈이 형의 부상이었다. (양)동근이 형, (문)태영이 형 등 대단한 선수가 많았지만, 모비스는 지훈이 형에게 초점이 맞춰진 팀이었다. 그런데 지훈이 형이 부상으로 빠졌으니 스몰라인업으로 남은 경기를 치러야 했다. 어쩔 수 없는 변화였지만, 공백을 메우기 위해선 뛰는 농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동근이 형과 함께 뛰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나의 경기력도 점점 좋아졌다.
유재학 당시 감독이 챔피언결정전을 치르던 도중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경기력이 크게 향상됐는데?
나도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걸 기사로 봤다. 1순위로 뽑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힘든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나를 잘 챙겨주셨던 분이다. 덕분에 이겨내고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었다. 선수로서 감독님으로부터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라는 말씀을 듣는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정규리그에서 2승 4패 열세였던 SK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 스윕을 따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원정에서 열렸던 1, 2차전 모두 접전이었다. 2경기를 연달아 따냈던 게 컸다. 그러면서 선수들의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했고, 솔직히 말하면 3차전 이겼을 때 끝났다고 봤다. SK의 의지가 꺾인 게 보였다. 결국 챔피언결정전은 분위기 싸움이다.

데뷔하자마자 우승해서 ‘몇 번 더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프로선수로 커리어를 쌓다 보니 쉽지 않다는 걸 여러 차례 느꼈다. 두 번째 시즌까지만 챔피언결정전에 올랐고, 이후 최고 성적은 4강이었다. 삼성에서는 플레이오프도 못 올랐다.
우승 다음 날 트레이드가 발표됐다. “김시래도 진작부터 인지하고 있었다”라는 소문도 떠돌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언제 트레이드를 통보받았던 건가?
로드 벤슨을 영입한 직후 형들이나 친구들로부터 “LG 간다며?”라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구단으로부터 들은 건 없다고 말했지만, 이 정도로 소문이 돌고 있는 거라면 시즌 끝나고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진 했다. 구단으로부터 처음 들은 건 우승 다음 날이 맞다. 당시 국장님이 새벽 6시에 찾아오셔서 나를 깨우셨다. 그러더니 침울한 표정으로 트레이드의 내막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곧 발표될 거라고 하셨고, “알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 후 한숨 더 잤다. 다시 일어난 후 동근이 형을 찾아갔던 게 기억난다.
통보받은 후 기분은 어땠나?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충격이 덜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승 후 하루도 지나지 않아 통보받은 거라 충격이 컸다. ‘기쁨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바로 발표가 난다고?’ 싶었다. 트레이드 후 1주일 만에 LG 선수들과 웨이트트레이닝을 위해 시애틀에 갔다. 챔피언결정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돼 지친 상태였다. 휴식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지만, LG는 이미 항공편과 숙소를 잡아놓은 상황이었다. 이제 LG 소속이니 뜻을 거스를 수 없어서 건너갔지만, 몸이 반응하더라. 어깨가 아파서 2주 만에 돌아왔다.
LG 이적 첫 시즌에 정규리그 우승을 했다. 돌아보면 당시 LG의 선수 구성은 주전, 벤치, 외국선수를 가릴 것 없이 화려했다.
너무 너무 좋았다. 1번부터 5번, 외국선수들까지 전력이 탄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챔피언결정전 우승까지 했어야 했다. 아쉽다. 아마 그때 우승했다면 LG에서 더 오래 뛰지 않았을까. LG는 농구에 진심이고 농구단에 대한 지원도 대단했다. 지나고 보니 더 크게 느껴진다. LG의 첫 우승은 물론 코칭스태프의 노력이 컸겠지만, 사무국의 지원도 뒷받침됐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라도 엇박자가 나오면 우승하기 힘들다.
발등 부상 때문에 2013-2014시즌 챔피언결정전 마지막 경기는 뛰지 못했다. 만약 부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도 벤치에서 지켜보는 것보단 동료들과 끝까지 함께 싸우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진통제까지 맞았는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돌파할 때 (이)대성이가 발등을 밟으면서 미세골절됐는데 생각보다 큰 부상이었다. 챔피언결정전 끝난 후 3개월 동안 쉴 정도였다.
데뷔는 모비스에서 했지만, 가장 오래 뛰며 전성기를 누린 팀은 LG였다. 김시래에게 LG란?
아무래도 제일 오랫동안 몸담았던 팀이어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방이동, 이천, 창원을 다 겪은 선수는 나밖에 없지 않은가. (최근 배병준이 LG로 트레이드되며 2호가 됐다고 전하자)아, (배)병준이가 있었구나. 그래도 병준이는 중간에 다른 팀에 갔다 왔으니까…(웃음).

기를 쓰고 열심히 했지만 결과가 안 따랐다. 항상 책임감을 갖고 뛰었지만 결과가 안 좋다 보니 너무 죄송했다. 삼성 시절은 팀에 대한 미안한 기억뿐이다. 운도 안 따랐다. 특히 외국선수 쪽에서 부상이 많았다. 아이제아 힉스가 나와 똑같은 부상을 당하며 시즌아웃되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어시스트를 꼽는다면?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LG에서 제임스 켈리와 뛸 때였다. 속공 상황에서 공을 띄워줬는데 ‘너무 높은데?’ 싶었다. 켈리가 그걸 앨리웁 덩크슛으로 연결해서 놀랐던 게 기억에 남는다. 운동능력 좋은 선수와 뛰면 패스할 맛 나겠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켈리만큼 운동능력 좋은 선수는 흔치 않았다. 수비력이 아쉽긴 했지만, 운동능력은 어마어마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동료는?
(김)종규는 너무 많이 얘기했으니까 빼겠다. 식상할 것 같다(웃음). 힉스가 기억에 남는다. 기량도, 인성도 훌륭한 외국선수였다. ‘힉시래’라 불릴 정도로 호흡도 좋았다. 그만큼 공간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고, 수비에서 중심을 잡아준 덕분에 국내선수들도 수비할 때 한 발 더 움직일 수 있었다. 부상 때문에 함께 뛴 기간이 짧았다는 게 너무 아쉽다. 파울이 많았던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다 막으려다 보니 1쿼터부터 파울 2개 범하고 시작한 경기가 많았다. 줄 점수는 주고 다음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 부분만 빼면 정말 좋은 외국선수였다.
DB에서 이관희와 함께한 건 1년뿐인데 급속도로 친해진 게 의외다.
함께 생활해 보니 많이 독특하지만 악의적인 사람은 아니더라. 티격태격이 티키타카가 됐다. 내가 “왜 그런 패스를 해?”라고 하면 (이)관희 형은 “야, 공 똑바로 안 잡아?”라며 욕했다. 같이 야식도 먹고, 당구도 치러 다녔다. (이관희가 차린 스테이크 전문점은 가봤나?)안 오면 죽인다고 해서 갔는데 맛있더라. 공짜로 달라고 하니까 욕을 욕을….
최고의 지도자는?
프로 시절만 얘기한다면 김진 감독님이다. ‘내가 더 잘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도 든다. 감독님 덕분에 더 날개를 펼 수 있었다. 공부를 많이 하는 인자한 감독님이다. 그걸 선수 시절에는 잘 못 느꼈다. 지나고 돌아보니 ‘대우받으면서 농구한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플레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풀어주셨다. 나에게 맞는 감독님이었다고 생각한다.
‘시래 파커’는 좀…(웃음). 아무래도 ‘시대대잔치’가 기억에 남는다. 내 이름을 알렸다는 점에서 최고의 별명이라고 생각한다. 운도 따랐다. 당시 농구대잔치 조별리그에서 고려대에 밀려 조 2위가 됐는데 6강에서 연세대를 이겼다. 그래서 4강에서 건국대까지 꺾으며 결승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사실 나랑 (박)지훈이는 4학년이어서 쉬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박상관 감독님이 뭔 얘기냐며 뛰라고 하셨다. 마음 편하게 임한 대회였는데 결과가 너무 좋았다.
농구교실 이름이 ‘퍼스트스텝’이다.
나로선 제2의 인생 첫 스텝이다. 농구를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의 첫 스텝과 함께한다는 뜻도 담았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게 됐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에 대해 자주 생각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출발점에서 함께하는 게 내 역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퍼스트스텝’은 아이들의 자신감과 태도를 키우는 공간이 될 것이다. 기술을 잘 가르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잘 들어주는 게 좋은 지도자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어떤 선수들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나?
현재까지는 7세부터 중3까지다. 일단 농구를 즐기면서 자신감을 쌓고, 협동심을 기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연습경기 끝나면 아이들에게 항상 “이기면 진 팀 선수들에게 경기해 줘서 고맙다고 하는 거고, 지면 이긴 팀 선수들에게 축하한다고 말해야 하는 거야”라고 얘기해준다. 그런 부분도 농구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과정 가운데 하나다. 학부모님들이 아이가 재밌어하고 다음 날 또 농구하러 가고 싶다고 말씀해 주실 때 보람을 느낀다.
인터뷰 일정 잡는 게 빠듯할 정도로 바쁘더라. 몇 명을 가르치고 있나?
125명 정도 된다. 첫 달부터 많은 분이 찾아주셔서 감사하지만, 숫자에 연연하진 않고 있다.
저학년일수록 공과 친해져야 한다. 농구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드리블이지 않나. 농구를 어느 정도 배운 학생들에겐 스텝의 중요성도 알려주고 있다. 오픈한 지 한 달밖에 안 돼 아직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향후에는 스크린을 활용하는 방법 등 더 폭넓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알려줄 생각이다.
‘어릴 때 이 부분을 더 체계적으로 다듬었다면…’이라고 꼽는 부분이 있다면?
수비를 더 다듬었어야 한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시키니까 멋모르고 따라다녔다. 그때 체격 훈련도 병행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러면 부딪치면서 하는 수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지 않았을까. 그 부분은 아쉽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좋은 감독님들을 만나 기초적인 부분에 대해 많이 배웠다. 특히 중학교 시절 김상준 감독님은 의자를 세워놓고 이미지 트레이닝하며 드리블 연습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다. 또한 가지 일화가 있다. 중학교 1년 선배 가운데 경기는 못 뛰지만 크로스오버만큼은 기가 막혔던 형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크로스오버를 아예 할 줄 몰랐다. 그 형에게 물어보니 NBA 영상 찾아보며 연구했다고 했다. 그 형이랑 1대1 하면 못 막았다. 없어지는 느낌이랄까? 쫓아다니면서 배우고 영상도 찾아보며 크로스오버를 익혔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선배든 후배든 나에게 필요한 기술을 잘 쓰는 사람이 있다면 가서 물어보라고 얘기한다. 부족한 부분을 배우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다.
현재 직함은?
대표님이긴 한데 학부모님들은 선생님이나 감독님이라고 하신다. 아직 직함이 어색하긴 한데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지 않겠나. 아이들은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넓은 공간을 구할 수 있는 수도권이 아닌 서울에 농구교실을 차린 이유는?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접근성이 좋은 공간이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밖을 가리키며)저렇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여기를 보며 농구에 관심을 갖지 않나(웃음). 공간적인 부분을 포기했지만, 이 정도 공간만 해도 농구다운 농구를 할 수 있다.
글 하나만 해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끝에 올린다. 유튜브도 촬영분은 많은데 농구교실 오픈한 후에는 바쁘다 보니 업로드를 못 하고 있다. 밀려서 큰일이다(웃음). 블로그나 유튜브도 중요하지만, 일단 수업을 진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으로의 포부는?
농구교실을 운영하면서 아이들과 더욱 깊은 소통을 하는 게 목표다. 농구라는 종목도, 농구를 통해 누릴 수 있는 즐거움도 계속해서 알리고 싶다. 농구를 재밌게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즐거운 일이고, 농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도 많다. 자신감, 멘탈, 협동심, 배려심 등등….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세상이지 않나. 농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게 아이들에게 전달된다면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는 거라 생각한다.
#사진_문복주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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