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우승을 향해 DASH! 또 다른 출발선에 선 이대성의 질주

최창환 기자 / 기사승인 : 2022-10-11 07:00:38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점프볼=최창환 기자] “남들 다 하는 거 말고 특별한 포즈 없나?” 이대성(32, 190cm)은 점프볼 표지 촬영 현장에서도 평범함을 거부했다. 직접 아이디어를 제안하며 독특한 포즈를 취하면서도 표정만큼은 ‘엄근진’을 유지했다. 표지 촬영뿐만 아니라 이대성이 농구를 대하는 자세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지만, 이대성은 늘 농구에 진심이었다. 대구 한국가스공사 유니폼을 입은 후에도 마찬가지다. 우승과 또 한 단계의 성장. 그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리고 있다.

※본 기사는 점프볼 10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트레이드가 공식 발표되기 전부터 소문이 무성했고 ‘가스공사행 유력’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당시 기분은 어땠나?
오리온(현 캐롯)이라는 팀이 사라지게 된 것도, 트레이드도 아쉽긴 했지만 이해 못 할 부분은 아니었다. 한 팀의 지도자, 리더가 바뀌는 상황이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딱 그 정도였다.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만 당황했을 뿐 일찍 이성적으로 정리를 했다. 마음의 준비가 다 됐기 때문에 공식 발표가 나왔을 땐 아무렇지 않았다.

현대모비스 시절에 데뷔 후 처음 트레이드를 경험했는데 그 당시에는 어떤 기분이었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기억이 잘 안 난다. 그 정도로 나에겐 충격적인 일이었다. 트레이드된 후 한 달 정도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애써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 인생에서 겪은 가장 임팩트가 큰일이었다. 비단 트레이드뿐만 아니라 누구든, 어떤 일이든 처음 겪어보는 경험에 대한 낯설음이 있지 않나. 그땐 정말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이번 트레이드에 대해 팬들은 충격적이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만 많이 생각했다.

김승기 캐롯 감독은 최근 방송 인터뷰에서 “이대성으로는 우승할 수 없다. 이정현과 출전시간을 나눠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정현을 더 성장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후 1명씩 전력을 보강해 우승에 도전하겠다”라고 말했다.
프로는 저마다 있는 색깔, 생각으로 경쟁해서 결과를 만드는 곳이다. 이게 맞다고 할 수도, 저게 맞다고 할 수도 있다. 게임만 해도 칼, 총 등 각자 지닌 무기가 다르지 않나. 결과를 만들어내면 그걸로 인정을 받고 영광을 누리고 사랑을 받는 게 프로스포츠다. 김승기 감독님은 그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트레이드를 하셨다고 생각한다. 나보단 (전)성현이를 1옵션으로 쓰고 싶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 나 역시 매 시즌 성장해왔고, 올 시즌 역시 우승의 핵심이 될 수 있도록 성장할 것이다. 오리온도 좋은 팀이었지만 나에게 또 다른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다. 가스공사는 훌륭한 감독님, 선수들이 있는 팀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또 한 단계 성장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시즌을 준비해왔다.

오리온에서 보낸 2시즌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
선수로 정말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강을준 감독님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지만 감독님은 결과를 만든 분이다. 그 결과의 기반은 믿음이었다. 선수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리더도, 선수들 스스로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길 바라는 리더도 있는데 감독님은 후자였다. 코트 안에서의 상황은 시시때때로 바뀌는데 우리들은 글래디 에이터다. 싸움에서 못 이기면 죽는다는 걸 선수들 스스로 더 잘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성장하는지, 이기는지 알고 경기할 능력이 있는 선수들이었고 감독님은 우리를 믿어주셨다. 나는 그 믿음 속에 성장했다. 오리온 이적 후 1년 차보다 2년 차 때 더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강을준 감독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새로운 방식으로 코트에서 경기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유명한 ‘딸 바보’인데 홀로 대구에 내려와서 생활하고 있다. 힘들진 않나?
집이 송도인데 오리온 시절에는 매일 출퇴근했다. 물론 현재 상황은 아빠, 남편으로선 아쉽다. 인생을 걸고 농구를 하고 있지만 나에겐 가족이 더 중요하다. 그에 따른 아쉬움은 분명 있지만 ‘농구선수 이대성’에게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다. 더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아침 일찍 나와서 오후까지 운동하고, 치료받고 돌아가면 집에서 잠만 잔다. 떳떳한 자세로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시즌에 평균 17점을 기록하며 국내선수 득점 1위를 했다.

오리온 소속 선수가 국내선수 득점 1위를 한 건 원년시즌 전희철 이후 처음이었다. 이 기록은 이대성에게 어떤 의미인가?
자부심이 큰 기록이다. KBL에서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삶을 대하는 선수는 없다고 확신하며 그게 결과로 나왔다. 주위에서 나를 보며 아쉬워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현대모비스 시절 우승했을 땐 ‘경기를 많이 못 뛰었다’라며 우승의 가치를 폄하했다. ‘한 시즌을 다 치르지 못하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오리온 이적 후 첫 시즌에 54경기 모두 뛰었더니 ‘효율이 떨어진다’라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나는 계속 성장했고 결과를 만들었다. 나는 항상 이단아였다. 르브론 제임스(LA 레이커스)처럼 왕관을 썼던 것도 아니고, 루카 돈치치(댈러스) 같은 유럽 최고의 스타도 아니었다. 국내선수 득점 1위는 내가 나아가고 있는 과정이며,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한민국 최고의 농구선수다. 거기에 맞춰 미션을 하나하나 달성해나가고 있다. 여기에 팀의 우승까지 뒷받침된다면 그동안의 노력을 보상받는 게 아닐까 싶다.

뒤늦은 나이에 미드레인지 게임을 장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노력을 했나?
(김)선형이 형이 3점슛을 장착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중거리슛을 못 던지는 선수였는데 33살에 경기를 주도할 수 있는 정도까지 끌어올렸다. (최준용도 올 시즌을 맞아 미드레인지 게임을 준비 중이라고 하던데?)모든 농구선수들이 미드레인지 게임의 중요성에 대해선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농구에는 비법이 없다. 요리처럼 양념 몇 스푼 넣으면 된다는 레시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있다면 누구나 다 잘했을 것이다. 알려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방법을 알게 돼도 내 것으로 만드는 데에 5년,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결론은 인생을 걸고 죽기 살기로 해도 될까 말까다. (최)준용이도 많이 좋아졌다. 많은 무기가 있어 아직 필요성을 크게 못 느끼겠지만 점점 와닿을 것이다. 준용이도 더 노력해서 (미드레인지 게임을)완벽히 채웠으면 한다.

유도훈 감독과의 첫 면담에서 어떤 얘기를 나눴나?
나를 편하게 대해주셨다. 배려와 존중을 해주셨고, 나를 납득시키셨다. (납득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건가?)나는 프로, 아마에 있는 지도자들이 얘기하고 강조하는 게 다 맞다고 생각한다. 옳은 얘기지만 선수에게 전달이 안 되더라. 그동안 문제라고 지적받은 부분이 납득 됐다면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을 것 같다. 나는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농구를 해왔다.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생지옥일 때가 더 많았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농구를 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김)효범이 형이 농구를 대하는 자세를 납득시켜줬고, 그 이후부터 아침에 일어나는 게 행복해졌다. 유도훈 감독님도 팀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납득을 시켜주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주셨다. 덕분에 즐거운 마음으로 운동에 임하고 있다.

가스공사라는 팀에 대해선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었나?
창단한 지 얼마 안 된 팀이다 보니 나도 팬들이 생각하는 정도였다. 사실 깊게 알진 못했다. 기존의 전자랜드에 대한 이미지가 남아있다. 전자랜드는 항상 끈끈하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팀이었다. 단단하다는 느낌이었고, 가스공사 역시 그 느낌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과거 인터뷰에서 “내가 원하는 포지션, 감독님이 원하는 포지션이 일치해야 하는데 현대모비스에서는 그게 맞았다”라고 했다. 가스공사에서 이 부분은 어떤가?
당시 내가 가장 자신 있었던 부분은 볼 핸들링하며 생긴 공간을 통해 투맨 게임, 픽&롤을 하는 것이었다. 완성형 선수는 아니었지만, 현대모비스는 그 역할을 믿고 맡겨주셨고 좋은 결과도 나왔다.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났다. KCC는 다른 면을 요구하셨는데 내가 그 역할을 할 정도의 실력이 아니었다. 훌륭한 선수라면 어느 상황이라도 그에 맞는 농구를 해야 한다. 결국 모든 팀이 우승을 원하는데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공 없을 때의 움직임에 대해 많이 인지하고 배웠다. 그 코멘트를 했을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생각하는 부분이 조금 다르다. 그게 제일 이상적이겠지만 선수라면 팀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맞춰야 한다. 그게 기본이 돼야 한다. 유도훈 감독님이 요구하시는 부분도 있고, 팀에서 나에 대해 기대하는 부분도 있다.

올 시즌을 함께 하게 된 유슈 은도예, 머피 할로웨이와의 호흡은 어떤가?
할로웨이와는 오리온에서 교감을 많이 나눴고 좋은 호흡도 보여줬다. 문제없을 것 같다. 은도예는 처음으로 함께 하게 됐는데 마인드,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정말 좋다. 세네갈 국가대표 주장다운 리더십도 갖고 있다. ‘어떻게 맞춰나가야겠다’라는 고민을 며칠 정도 했는데 그조차도 실례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뢰하고 있다. 결국 팀이 잘 될 때보다 안 될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안 좋을 때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게 팀이 지닌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은도예가 지닌 내공이라면 충분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

아시아쿼터 제도를 통해 필리핀 선수들이 많아졌다. 리그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 같은지?
너무 좋다. 농구는 점점 세계화되고 있다. 문호를 더 개방해야 농구도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필리핀 선수들의 장점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나도 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벨란겔과의 호흡도 잘 맞는다. 이제 막 프로선수가 돼 어려운 부분도 있을 텐데 잘 적응하고 있어서 대견하다.

올 시즌이 끝나면 다시 FA가 된다. 조금 더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상황일 것 같은데?
첫 FA라면 동기부여가 됐을 것이다. 한 번 경험해봤는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FA라는 게 내 생각대로 되는 건 많지 않더라. FA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도, 준비도, 예상도 안 하고 있다. 매일매일, 매 경기 최선을 다해 치르며 팀이 나아지는 데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첫 FA가 되기 직전 다시 해외 진출을 알아보기도 했다. 이제는 어려운 목표일까?
이것도 FA와 비슷한 것 같다. 진지하게 알아봤던 건 사실이지만 코로나19라는 변수가 생겼다.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내가 농구를 진짜 잘하면 안 가고 싶어도 해외 팀 관계자들이 와서 데려가지 않겠나. 결국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더 성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전에 스티브 내쉬를 좋아해서 영어 이름도 대쉬로 지었다. 현재 좋아하는 NBA 선수가 있다면?
지난 시즌에는 미드레인지 게임을 만들기 위해 더마 드로잔(시카고)의 경기를 많이 봤다. 코비 브라이언트도 좋아하는데 현대농구에서 코비와 가장 비슷한 스타일이 드로잔이라고 생각한다. 다 따라 할 순 없겠지만 드로잔의 리듬을 배우고 싶었고, 많은 영상을 찾아본 게 도움이 됐다. 경기운영에도 관심이 많다. 팀원 전체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싶을 땐 크리스 폴(피닉스)의 영상을 찾아본다.

최준용과의 브로맨스가 유명하다. 대표팀에서 만난 후 절친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
농구를 좋아하는 부분에 있어 나와 생각이 잘 맞는다. 눈치도 빠르고 생각도 순수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농구에 대한 가치관과 가장 비슷한 면을 갖고 있는 선수다. (나중에라도 같은 팀에서 뛰어보자는 얘기도 했을 것 같은데?)대표팀에서 같이 뛰고 있다. 인간관계라는 게 너무가까우면 안 된다. (최)준용이와 함께 있으면 너무 즐겁지만 적절한 거리는 유지해야 할 것 같다. 365일 붙어있으면 와이프와도 싸울 수 있는 게 인간관계다(웃음).

정규리그, 챔피언결정전 가운데 더 가치 있는 우승을 꼽는다면?

당연히 챔피언결정전이다. 54경기라는 강행군을 치르는 정규리그의 가치도 크지만, 결국 마지막 승자로 남는 건 챔피언결정전이다.

다른 팀 얘기지만, 유재학 현대모비스 감독이 총감독으로 물러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기분은 어땠나?
당황스러웠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감독님 덕분에 기회를 받았다. 그 기회를 통해 좋아하는 농구를 할 수 있었고, 지금도 행복한 마음으로 농구를 하고 있다. 나에겐 은인이다. 일선에서 물러나셔서 허탈하고, 한편으로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언젠가 감독으로 돌아오시지 않을까. 코트에서 다시 뵀으면 하는 마음이다. 모든 걸 이뤘지만 감독님은 승부사다. 힘닿는 데까지 승부를 즐기는 분이기 때문에 돌아왔으면 한다. 상대 팀이든 어디서든 코트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유재학 총감독에게 배웠거나 들었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걸 꼽는다면?
신인 시절 대표팀 소집훈련의 기회를 주셨다. 그때 “네가 양동근 다음으로 가드 계보를 이어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은퇴 후 내 농구 인생을 돌아보면 분명 그 자리에 도달해있을 거라 확신한다. “간절한 사람이 이긴다”라는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내 삶의 모토가 된 한마디이기도 하다. 훈련소 있을 때 감독님께 “은퇴하신 후 농구 인생을 돌아봤을 때 수많은 농구인, 제자가 지나갈 텐데 제가 제일 간절했던 선수로 기억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

김승현, 전태풍과 같은 화려한 농구를 좋아했지만 프로 데뷔 후 존경의 대상이 양동근으로 바뀌었다고 한 말도 기억에 남는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다. 정규리그 MVP, 우승의 가치도 훌륭하지만 챔피언결정전 MVP는 그보다 더 대단한 자리다. 시간이 지나며 농구에서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 좇아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게 됐다. 어릴 때는 김승현 선배가 제일 멋있었고, 그게 최고의 농구인 줄 알았다.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그 시대의 승자는 양동근 선배였다. 부상도 실력이다. NBA에서도 크리스 폴이 훌륭한 포인트가드로 꼽히지만 결국 더 좋은 선수라는 얘기를 듣는 건 르브론 제임스이지 않나.

이제 30대 중반으로 향하고 있다. 앞으로의 선수생활을 내다 봤을 때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현대모비스에서 챔피언결정전 MVP를 받을 때 십중팔구는 나를 좋아하고 믿어줬다. 이후 불과 몇 개월 사이 여러 변수가 일어나자 십중팔구가 의구심을 던지는 것으로 여론이 바뀌었다. 그때 인터뷰에서 “10년 뒤에 보자”라고 얘기했다. 2년이 지났으니 이제 8년 남았다. 그래서 표면적인 나이는 30대 중반이지만 이제 3년 차라고 생각한다. 정신적으로도 어떤 신인들보다 맑고 건강하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때 얘기한 10년 뒤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지켜봐줬으면 한다. 남은 8년도 내가 생각한 방향대로 걸어가고 싶다.

BONUS ONE SHOT “충암이 형의 꿈, 대신 이루겠다”

이대성은 걸어온 길만큼이나 등번호도 남다르다. 삼일상고 시절에 에이스를 의미하는 11번, 중앙대 시절에는 코비 브라이언트를 동경하는 마음을 담아 24번을 썼지만 프로 데뷔 후에는 줄곧 43번을 사용하고 있다. 농구선수들 가운데 40이 넘어가는 등번호는 외국선수를 제외하면 보기 드물다. 덕 노비츠키를 좋아하는 마음을 담은 오세근의 41번이 그나마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대성이 달고 있는 43번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43번은 동국대를 거쳐 2012년 전주 KCC에 입단했던 이충암의 등번호다. 이대성과 어릴 때부터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농구 선배다. 이충암은 프로에서 이렇다 할 자취를 남기지 못한 채 일찍 은퇴했고, 이대성은 ‘(이)충암이 형이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루자’라는 의미를 담아 43번을 쓰게 됐다. G리그에서 뛸 때는 장재석의 등번호인 31번을 사용했다. 이 역시 어린 시절 미국무대를 함께 꿈꿨던 장재석과 함께 한다는 의미였다. 이대성을 의미하는 숫자가 된 43번의 원조 이충암이 43번을 등번호로 사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충암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KCC 입단 후 43번을 사용했던 이유는?
큰 의미는 없었다. 나는 7번을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인기 있는 번호다 보니 항상 선배들이 쓰고 있었다. 입단 후 남는 번호 중 고른 게 43번이었다. 신인들은 보통 30대 등번호를 써서 나는 남다른 번호를 하고 싶었다. 대성이가 드래프트에 참가하기 직전 커피를 마시다 등번호 얘기가 나왔다. “내가 빨리 은퇴했으니 43번을 달고 내 꿈을 이뤄줬으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43번을 사용하더라. 잘 풀리는 모습을 보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요새는 대성이 따라서 43번을 사용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이대성과의 친분은 어떻게 생긴 건가?
내가 동아중 3학년일 때 대성이는 임호중 1학년이었다. 동아중은 그때도 지금도 체육관이 없어서 종종 임호중과 훈련을 같이 한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청소년대표팀에 뽑혔을 때도 대성이가 다니는 학교와 연습경기를 자주 하다 보니 친해졌다. 대성이가 처음 미국 가기 위해 영어공부 할 때 공교롭게 둘 다 부산에 있었다. 그때도 자주 밥 먹으며 농구 얘기를 많이 했다.

학창시절 이대성은 어떤 선수였나?
어릴 때도 당돌했고 색깔이 강했다.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훈련을 자주 한다고 해도 다른 학교 선배에게 말을 거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대성이는 그때도 농구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나한테 먼저 다가와서 이것저것 배우고 싶은 부분에 대해 물어봤다. 항상 앞을 내다보며 농구를 대했던 선수로 기억한다. 그래서 미국에도 다녀오는 개척자가 됐다고 생각한다.

2016년 임용시험에 합격해 영운중 교사로 재직 중이라는 게 가장 최근에 알려진 소식이었다. 현재는 어디서 근무하고 있나?
팔룡중 농구부 감독이 돼 후배들을 육성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올해부터 농구부장을 맡게 됐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이대성에게 응원의 한마디를 남긴다면?
대성이는 항상 최고였다. 다치지 말고 지금 마음 그대로 농구 했으면 한다. 워낙 열정이 강하다 보니 다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이제 (열정을)조금 내려 놓아도 된다(웃음). 올 시즌은 우승할 거라 기대하고 있겠다.

#사진_점프볼DB(문복주, 박상혁 기자), 이충암 제공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JUMPBALL TV

오늘의 이슈

점프볼 연재

더보기

주요기사

더보기

JUMPBALL 매거진

더보기